통합 6년제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역할과 방향

The Role and Direction of Medical Humanities in Integrated 6-Year Medical Educati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Med Educ Rev. 2025;27(2):119-131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5 June 30
doi : https://doi.org/10.17496/kmer.25.010
Department of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Ajou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uwon, Korea
김신권orcid_icon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Corresponding author: Shin Kwon Kim Department of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Ajou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164 Worldcup-ro, Youngtong-gu, Suwon 16499, Korea Tel +82-31-219-5089 Fax +82-31-219-4567 E-mail: shink@ajou.ac.kr
Received 2025 April 10; Revised 2025 June 16; Accepted 2025 June 17.

Trans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role and direction of medical humanities education within the newly introduced integrated 6-year medical education system, emphasizing its significance from a humanities perspective. The system represents a paradigm shift, as it embeds medical humanities as a core component rather than treating it as an optional subject. The paper argues that medical humanities is essential for fostering deep understanding and reflection on humanity during the process of becoming a physician. Medical humanities education not only enhances learning competencies but also instils intrinsic values, recognizing medicine as fundamentally oriented toward humanity. The study advocates for spiral curricula and integrative approaches, referencing models such as the Fundamental Role of the 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by 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which incorporates arts and humanities. However, it also emphasizes the need for a distinct direction tailored to Korea’s sociocultural context, moving beyond the universality of biomedicine. The concept of “negative capability” is highlighted as a vital skill developed through medical humanities, enabling physicians to navigate uncertainty and ambiguity—skills essential for patient-centered care in complex clinical environments. The paper suggests responding to the challenges pos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by strengthening field-based education, adopting process-oriented assessments, and promoting digital literacy. In conclusion, “medical humanities” plays a crucial role in integrated 6-year medical education by equipping future physicians with empathy, humanity, and wisdom to manage uncertainty, alongside their scientific knowledge. This approach ensures that physicians retain their humanity throughout their professional journey, recognizing medicine’s dual scientific and humanistic dimensions.

서론

한국의 의학교육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통합 6년제 의학교육체계의 도입이다. 기존의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으로 분리되었던 의학교육체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유연하고 연속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이 개혁안은 미래 의료환경에 필요한 다양한 역량을 갖춘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단순한 교육과정의 재편이 아닌 의학교육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통합 6년제라는 제도는 일종의 교육철학적 전환이며 기존에 학생들이 의과대학 외부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하였던 ‘의학교육 예비과정’을 의과대학의 주요 교육과정에 편입시킴으로써, 의과대학이 주체적으로 운영의 책임을 갖게 된다. 따라서 많은 의과대학에서 의예과 기간 동안 의과대학 밖에서 교육하던 여러 교양과목을 통합 6년제라는 의과대학 중심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재편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교과목과 교육과정의 확대를 넘어서는 중요성을 띠게 되는데, 의과대학이 기존에 집중했던 ‘의사라는 직업에 적합한 사람을 키우는 교육’뿐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교양을 갖춘 사람을 키우는 교육’까지 함께 책임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의과대학이 규정한 모든 역량 가운데 특히 일반적으로 어려워하는 전문직업성, 윤리와 사회적 책임, 공감과 소통능력, 자기성찰과 비판적 사고 등 비인지적 역량(non-cognitive competencies)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의 설계, 운영, 평가를 모두 의과대학이 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합 6년제 의학교육이라는 구조 안에서 일반적 교양부터 소프트 스킬(soft skill)까지를 아우르게 되는 의료인문학 교육은 더욱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교육체계에서 많은 경우에 의학의 부수적인 요소로 ‘교양’처럼 선택적으로 다루어졌던 의료인문학은 의학교육의 필수적인 교육 요소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새로운 체계 안에서는 학생들의 교양과 비인지적 역량을 기존의 의예과 기간뿐 아니라 6년에 걸쳐 연계성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생기며, 이는 의료인문학이 일회적 과목이 아니라 전 과정에 걸친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에 따르는 교육과정의 개발도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의료인문학의 개념적 정의, 교육내용, 교육방법, 평가체계 등에 대한 합의된 틀이 부재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국적 맥락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 논문은 의료인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자적 관점에서 통합 6년제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역할과 의미를 탐색하고, 효과적인 의료인문학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첫째, 통합 6년제 교육의 의미와 의료인문학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둘째, 의료인문학과 인문사회의학의 개념적 구분을 시도한다. 셋째, 의료인문학 교육의 필요성과 목표를 탐색하고, 넷째, 의료인문학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논의한다. 다섯째, 한국적 맥락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여섯째, ‘부정적 상황을 수용하는 힘’(negative capability)이라는 관점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의 가치를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시대에 의료인문학 교육이 직면한 도전과 가능성을 탐색한다.

통합 6년제 교육의 의미와 의료인문학

의과대학 통합 6년제는 기존의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으로 분리된 의학교육체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유연하고 연속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개혁안이다. 이 제도는 의과대학에 더 큰 자율성을 부여하고, 미래 의료환경에 필요한 다양한 역량을 갖춘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통합 6년제의 핵심은 교육과정 설계의 유연성 확보이며 6년 범위 내에서 각 대학이 상황에 맞게 교육과정을 설계·운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유연성은 각 대학이 고유의 교육철학과 목표에 맞는 교육과정을 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1].

각각의 의과대학은 통합 6년제라는 확장된 공간을 활용하여 기초의학, 임상의학, 의료인문학이 분절되지 않고 6년 동안 나선형으로 통합되어 일관성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으며, 과목 간 수평통합, 기초·임상 간 통합 및 강화,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등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변화하는 제도를 통해 각 대학이 특성화된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의과대학이 위치해 있는 지역적 특성에 맞는 다양한 분야의 의료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되는 동시에, 학습 내용을 6년에 걸쳐 균형 있게 배분함으로써 특정 학년에 학습 부담이 집중되는 현상을 완화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통합 6년제를 도입하면서 의과대학들은 결국 기존 교육과정에서 ‘의예과’라는 일종의 의학 준비과정(pre-medical) 자체를 통폐합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 의학교육에 있어서 전례 없는 도전이며 이 지점을 교수, 학생을 포함한 의과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존의 체계에서는 과학적 관점에서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그리고 임상실습으로 이루어지는 4년간의 의학과 교육이 의과대학의 주된 책무였고 2년의 의예과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에 근거한 준비과정으로 여겨졌던 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제 학생들의 자율성에 근거한 2년의 의예과 교육과정을 6년 과정으로 통폐합하면서 의과대학은 학생들이 의사가 되기에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요소를 전체 교육과정을 통해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의과대학의 책무는 의과대학이 제공하는 교육과정 안에서 학생들이 의사가 되도록 하는 모든 요소를 충분하게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의과대학이 집중했던 (1) 의사라는 직업에 적합한 사람을 키우는 교육과정뿐 아니라, (2) 의사라는 직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교양을 갖춘 사람을 키우는 교육과정 모두가 의과대학의 책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이미 학부과정을 마치고 교양인으로서 준비가 잘 되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대학원과정에서 가르칠 수 있는 미국식 의학교육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될 수 있다. 한편,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의사되기’와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의학’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 또한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변화는 (1) 과학에 근거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그리고 임상실습 이외에도 의사되기를 위해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는 인식에 대한 공유와, (2) 이전에 ‘의학’이라고 말할 때 좁은 의미에서 통상적으로 고려되었던 분야와 주제들 이외에 더 다양한 분야들이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의학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3) 의과대학의 교육이 기존의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연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통합적 형태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의과대학이 제공하는 모든 과정이 6년이라는 전체 구조를 염두에 두고 배치, 조정, 혹은 생성되어야 하는 통합 6년제라는 재구조화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특히 눈에 띄는 지점은 바로 인문사회의학 혹은 의료인문학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의료인문학은 의사라는 직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교양을 갖춘 사람을 키우는 교육과 크게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전문직업성, 윤리와 사회적 책임, 공감과 소통능력, 자기 성찰과 비판적 사고 등 의과대학 교육이 추구하는 학생들의 비인지적 역량까지 아우르게 되는데, 이러한 역할은 새로운 교육구조에서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전의 교육체계에서 많은 경우에 의학의 부수적인 요소로 ‘교양’처럼 선택적으로 다루어졌던 의료인문학이 6년제라는 새로운 틀에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제도 안에서는 의료인문학이 담당해야 하는 교육적 요소들을 학생들의 자율성에 맡기거나 의과대학의 교육과정 바깥에서 다른 주체에게 맡길 수 없고, 맡기고 방관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통합 6년제 교육을 준비하거나 시행하는 의과대학은 의료인문학에 더 많은 관심과 자원을 투입하여야 하며, 이것이 새롭게 주어지는 의과대학의 책무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의료인문학과 인문사회의학

통합 6년제 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교육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의료인문학과 인문사회의학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며, 이것이 방향성 설정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주제는 의과대학을 배경으로 인문학을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는 원천이 되어왔다. 우선, ‘인문사회의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러 의과대학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영어권에서 적확하게 대응하는 용어는 찾기 어렵다. 이 용어는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혹은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보아 인문의학과 사회과학 혹은 인문의학과 사회의학의 합성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인문의학이라는 말은 대체로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과 동의어로 인식되는 반면, ‘social sciences’는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을 의미한다. 반대로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를 직역하면 ‘의료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되고,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을 직역하면 ‘의료인문학과 사회의학’이 된다. 사회의학(social medicine)이라는 말은 의학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예방의학(preventive medicine)이나 보건학(public health)과의 관련성이 더 두드러지는 개념이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비롯된 사회학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의학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의학의 사회적 측면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방의학과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하는 특정한 학문 분과로서 기능한다[2].

과학에 근거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이외의 모든 것을 인문사회의학으로 통칭하자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3], 이 경우에도 예방의학이나 보건학, 혹은 의료법을 인문사회의학에 포함시켜서 고려하지는 않는다. 또한 최근에 회자되고 있는 의료시스템과학(health systems science)을 인문사회의학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이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4]. 어떤 의미에서 인문사회의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한국적 상황에서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이나 과목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분류적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적 의학교육체계에서 인문사회의학에 대응하는 동일한 학문분야나 용어 자체가 없기 때문이며, 이 분야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의과대학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AAMC)에서 2020년에 만들어 낸 “의학교육에서의 예술과 인문학의 근본적인 역할”(The fundamental role of the 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FRAHME)이라는 보고서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5].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개념인 인문사회의학에 상응하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고, ‘의학교육에서의 예술과 인문학’(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이라는 용어로 인문학적 주제들을 포괄하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예술 형태와 인문학의 주제들이 포함된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 자체도 큰 의미에서는 인문학의 하나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이 보고서에서는 의학교육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할 다양한 예술형태와 인문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이른바 사회의학(social medicine)이나 예방의학, 의료법, 그리고 보건학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보고서가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사회의학’이라는 명칭은 한국적인 특수성을 바탕으로 외부적 관점에서 교실과 학과의 분류를 위해 만들어 낸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여기에서 학문적 정체성의 불확실성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의 의학교육에서 ‘인문사회의학’이라는 개념의 정착이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이는 단순히 여러 학교의 교실이나 학과의 명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상과 기초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다양한 학문적 분야들을 의학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 실제적인 적용과 관련한 생산적 논의를 위해서는 사회의학적 측면을 제외한 ‘의료인문학’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는 편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진다. 의료인문학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1940년대 말 미국에서 의학의 비인간성과 의학교육이 직업교육화 되는 추세에 대한 반성으로 정리된 것이다[6].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전세계적인 흐름은 의료인문학의 개념과 명칭을 건강인문학(health humanities)으로 바꾸고 있는 추세이다[6]. 이는 의학 전반에 걸쳐 학문적인 지향점이나 강조점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학은 질병중심주의(disease-centered)를 벗어나 건강중심주의(heath-centered) 혹은 회복중심주의(recovery-centered)로 나아가고 있으며 의료인문학의 확장된 개념체계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해하고 현실 상황에 적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료인문학이라는 분야에는 여러 가지 특수성이 있다. 의료인문학은 의학과 관련한 인문학이라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인문학의 한 분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라틴어 ‘studia humanitatis’에서 유래했고 신학과 대비된 ‘인간성 연구’를 의미하던 ‘인문학(humanities)’이라는 분야는 근대 이후에서부터 이를 구성하는 각론의 내용은 정의가 가능하지만 학문 내부의 분류적 구성을 포괄하는 총론의 내용은 그 자체로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역사학, 철학, 문학은 각론으로 존재하지만 인문학 자체는 어떤 것인지 그 학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의료인문학도 사실은 그 자체로 고유하며 충족적인 학문분야가 아닐 수 있다.

의학의 역사, 의학에 관한 철학, 의학에 있어서의 윤리학, 의학과 문학 등은 각각 주요한 학문의 분야로 여겨지고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유명론(nominalism)이라는 관점에서 정작 이들을 포괄한다는 의료인문학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며 내용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따라서 의료인문학 그 자체만으로는 내용 전부를 자기 충족적으로 채울 수 있는 고유한 학문분야가 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의료인문학이라는 개념 자체도 일종의 우산 개념(umbrella term)으로 이해할 수 있고, 어떤 내용이 속하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는 있어도 무엇이 의료인문학인지를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론(realism)의 입장에서 의료인문학은 역으로 인문학, 예술 분야 내의 각 학문의 주제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의학과 관련한 인문학, 예술 그 자체가 결국 의료인문학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면 보건학이나 예방의학을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좀 더 역사, 철학, 문학, 예술 같은 인문과 예술 분야들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의료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활동영역에서 적용되는 개념이다[6]: (1) 의학을 연구하는 인문학, (2) 의학교육에서의 예술과 인문학(medicine as art), (3) 의료를 주제로 한 대중 전시예술, (4) 건강을 위한 예술(arts for health), (5) 예술 요법.

이러한 관점에서 엄밀히 말해서 의학이라는 학문을 교육한다는 것과 의사를 만드는 교육을 한다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교육하는 것은 맞지만 이러한 교육과 학습 활동은 분명하게도 ‘의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목적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료인문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연구하는 것과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에서 의료인문학을 포함시킨다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의과대학의 교육과정 안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정작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은 자기 충족적인 학문의 분야라고 할 수 있지만 의사를 만드는 의학교육이라는 상황(context) 안에서 적절하게 기능할 때 이것을 의료인문학으로 부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은 대단히 명확하다. 의료인문학은 의학이 가진 인문학적 요소를 다룰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도 ‘의사’가 되어야 할 ‘인간’과 의사가 직업 속에서 만나야 할 다양한 ‘인간’에 집중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경우에 의과대학에서 ‘인문사회의학’을 표방하는 교육체계가 정작 의료인문학이나 ‘인간’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의료인문학적 주제들이 의과대학의 전체 교육과정 안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협력하며 ‘인간’ 의사들을 길러내도록 돕는지가 의료인문학 교육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의과대학생들이 의료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더욱 복잡해진 오늘날의 의료시스템은 예전과 달리 임상현장에서 필요한 다양한 역량을 요구한다. 이는 ‘의사되기’가 이전과 다른 개념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며 최근에 요청되는 역량은 이전과 다를 수 있다.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는 의학교육의 결과물로 다음과 같은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1) 의사소통능력, (2) 팀워크/리더십, (3) 환경에 대한 적응력, (4) 창의성, (5) 비판적 사고, (6) 공감능력, (7) 사회적 책임, (8) 회복탄력성 등.

이러한 역량들은 의학교육 전반에 걸쳐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무런 노력 없이 발전되기는 어렵다. 의료인문학은 자연 과학적 접근으로는 다룰 수 없는 인간의 상태, 질병 경험, 자기 인식 및 전문적 책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역량들과 관련하여 의학교육 내에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논의들이 발전되어 왔고, 이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학생들은 의료인문학을 통해 의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배울 기회를 갖게 된다. 인간다움이 어떻게 의학과 의료시스템 안에서 나타나고 지켜질 수 있는지를 배우고 환자의 고통을 생물·심리·사회적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7,8]. 다음으로 이는 공감을 통한 의사-환자 관계의 성숙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사되기가 인격을 가지지 않은 질병을 제거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인간을 만나는 과정에서 달성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의료인문학은 의학적 지식과 술기뿐 아니라 전문직업성을 통해 의사되기가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경험하는 전문직업성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하게 되고 의료현장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Horton [9]의 논문 “부모 없는 아이: 현대 의학교육에서의 인문학” 은 다음과 같이 의료인문학 교육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문학은 자신과 다른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성찰의 능력을 키워준다. 학생들은 의료인문학을 통해 ‘생각하는 인간, 성찰하며 반성하는 인간’이어야 하고 이것이 의사되기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의료인문학의 과정을 통해 철학적인 반성을 훈련하고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념과 가치를 인간중심주의적으로 재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특히 입학 때부터 폐쇄적인 학습환경에 처해있는 의과대학생들은 편견이나 좁은 시각에 빠지기 쉬운데, 이를 벗어나서 보다 포용적이고 넓은 사고를 갖게 도움을 준다. 결국 이러한 능력은 의사가 되어서 적절한 임상적인 판단을 내리는 바탕이 된다. 의료인문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정말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알게 해준다. 단순한 병력청취가 아니라 환자들의 입장에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인지하고, 이해하고, 해석해서 이를 바탕으로 어떤 적절한 선택을 할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돕는다. 환자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을 배운다는 것은 무지와 신비를 없애고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상의학의 세계에는 결국 불확실성과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며 의사가 된다는 것은 이들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학을 통해서 의과대학생들은 불확실성을 껴안는 방법을 배우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과 이웃을 살피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러므로 의료인문학이란 결국 여러 학문 분야와의 대화이며 의학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구조를 해체하고, 여러 가지 다른 가치관에서 나타나는 여러 세계관을 조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의과대학생들이 조화와 협력을 만드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와 더불어 의료인문학 교육이 배양할 수 있는 다른 역량들도 많이 있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의료인문학 교육을 통해 공감과 배려심을 키우고, 사회적 차이를 존중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의료인문학 교육이 공감, 문화적 인식, 관찰능력, 팀워크, 사고력, 경청능력 및 소통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10], 의료인문학은 의과대학생들이 스트레스와 소진을 줄이고, 지혜, 공감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11]. 또한 예술과 인문학은 의사들이 더 나은 관찰자와 해석자로 성장하고, 공감, 커뮤니케이션, 팀워크 스킬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게 된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이며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12].

위와 같은 필요성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도구적 근거: 전문 역량 개발, (2) 본질적 근거: 의학은 본래 인간학.

도구적 근거는 의료인문학이 임상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전문역량 개발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의료인문학을 통해 환자에 대한 공감능력 및 문화적 감수성이 향상되고, 의사-환자 관계에 필수적인 커뮤니케이션 및 청취기술이 향상되며 임상상황에서 분석적 추론 및 관찰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자기 인식 및 성찰능력이 향상된다.

본질적 근거는 의학이 본래적으로 위치한 인문학적인 성격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의학은 본래 인간학이고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생의학의 시대에도 과학적인 커리큘럼에 균형을 잡는 인간다움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의학은 과학만큼이나 예술적 영역을 간직하고 있고, 의학이 마주하는 질병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적 관점이 필수적이다. 또한 임상의 윤리적 차원에는 철학적 토대가 필요하며 환자 중심 접근방식은 인간 경험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의료시스템이 점점 더 증거 기반 접근방식에 의해 지배됨에 따라 인문학의 본질적 가치는 의학의 인간중심적 차원을 회복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를 의학교육에서 수용하는 의료인문학은 단순한 의학 지식이나 술기를 교육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으로서의 ‘의사’ 되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제시된 역량들은 의료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3]. 그러나 많은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이 의학교육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 내용과 교육방법은 표준화되지 않았으며, 의료인문학의 정의도 다양하게 해석·적용되며, 장기적인 이점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앞서도 논의한 바 있지만 우리에게는 의료인문학을 의학교육에 통합하기 위한 포괄적인 이론적 틀이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다.

의료인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

그렇다면 의료인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 의과대학에서 인문학 교육과정을 만들면 그것은 의료인문학인가? 앞서 논의한 바 있지만, 의료인문학이 의학교육에서 ‘교양’이거나 ‘보조적’(auxiliary) 과목이라는 고전적 관점을 바탕으로 교양 있는 의사(learned physician)들이 개인의 인문학적 관심사를 의과대학에서 수업하는 것이 의료인문학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물론 의과대학에서 제한적인 기존의 교수자원을 배경으로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14]. 그러나 이는 의료인문학의 학문으로서의 정체성과 교육과정의 전문성을 확인하고, 이를 위한 교수자원의 전문성을 확보하려는 과도기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의료인문학이 의과대학에서 반드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공유되면 적절한 교수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이전에는 가르칠 의지가 있는 기존 교수자원의 개인적 관심사에 기대어 제한적인 범위에서 교과과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료인문학의 발전을 막아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교육과정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what we have to teach)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의료인문학 교육과정을 만들고자 한다면 따르는 수순은 기존의 교수자원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what we can teach)를 먼저 고려하게 되는데, 이는 의료인문학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학습자가 의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what they have to learn)를 먼저 고려하고 나서 과정이 기획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대략적으로 인문학이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연구를 말하고 대표적으로 역사, 문화, 예술, 철학, 윤리 등을 포함한다면, 의료인문학의 대략적 정의는 의학을 배경으로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한 연구를 말한다고 할 수 있고, 대표적으로는 역사, 문학, 예술, 철학, 윤리 등을 포함한다. 예술과 인문학은 공감, 전문성, 문화적 민감성, 윤리적 사고 등을 증진시킬 수 있고, 문학은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고, 음악은 적극적 경청을 촉진하며, 미술은 임상 팀 간의 의사소통 장벽을 허물고 협업을 강화할 수 있다. 역사와 인류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사회적 요인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도록 돕게 된다[15].

의과대학의 교육과정 안에서 이러한 주제들은 각 학교의 교육목표와 환경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AAMC의 보고서 FRAHME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포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Table 1) [5].

Applications of 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여기에서 언급된 주제들은 고전적인 인문학과 차별되는 동시에, 앞서 논의한 바대로 사회과학적 주제와는 거리가 있고, 이미 예방의학이나 법의학, 혹은 의료법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고유한 의학교육환경에서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특히 통합 6년제 의학교육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 분명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야 하는 길이라면 전례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창의적이고 거대한 틀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의료인문학이 다뤄야 하는 주제를 선정함에 있어서 일정한 원칙과 교육공동체의 합의과정은 필요하다. 적어도 6년간의 교육과정을 의과대학에서 책임 있게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의료인문학에서 다루는 주제를 선정하기 위한 두 가지의 원칙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 인문학, 예술과의 융합학문적 성격을 견지할 것, (2) 의사되기에 집중하는 전문직 교육과 함께 의학교육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견지할 것.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 의료인문학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교육과정과 함께 의사되기에 필요한 학습자 개개인의 역량을 키워 나가는 다중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 현재 많은 의과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의학, 윤리와 철학에 대한 이해, 의학과 문학, 예술과 의학,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 의사-환자 관계와 의료커뮤니케이션,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의 의학 이해,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디지털기술과 의료인문학의 융합, 돌봄의 철학과 실천, 생명 의료윤리와 연구윤리 등 다양한 주제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의학에서 예술과 인문학의 통합

통합 6년제의 의학교육과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의료인문학의 구성방식은 크게 나선형적 구성과 융합/통합 구성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나선형적 교육과정은 학습내용을 반복적으로 다루면서 점진적으로 심화시키는 교육모델로, 학생들이 이전에 배운 지식을 새로운 학습내용과 연결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도록 돕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방식은 개별 과목에 대한 교육에도 적용될 수 있고 수평-수직적 통합의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의학교육 전 과정에 걸쳐 수평적(다양한 학문 간 통합) 및 수직적(기초부터 심화까지 단계별 학습) 통합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나선형 커리큘럼에서는 특정 주제를 여러 번 반복적으로 다루되 매번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과 심화된 내용을 추가하여 학습자가 이전에 배운 내용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 지식에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이러한 방식은 기초와 임상의 연결을 심화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다음으로 의학교육에서 예술과 인문학의 통합 교육모델은 ‘단일 강좌나 학습프로그램의 맥락에서 여러 학문 분야의 지식, 탐구방식, 교수법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2018년 미국 과학공학의학 한림원(National Academies of Sciences, Engineering, and Medicine)이 발표한 보고서는 점점 더 좁아지는 전문화의 시대에 고등교육이 예술과 인문학을 과학과 통합하는 모델을 의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이를 적용한 바, 예술과 인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의학교육에 통합하는 것이 이러한 모델이다[16].

앞에서 언급한 AAMC의 보고서 FRAHME은 이 점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의료인문학과 예술을 단순히 추가적인 학습요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핵심 역량 개발의 중심축으로 통합하여 의학교육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였다. 특히 다학제 협력, 정서적 웰빙 강조, 사회적 책임 강화 등에서 기존 의학교육모델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미래 지향적인 의료인 양성을 위한 혁신적인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FRAHME이 제시하는 주요한 통합방식은 다음과 같다. (1) 단일 선택과목 제공: 특정 예술 또는 인문학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제공; (2) 프로그램 전체에 걸친 완전한 통합: 커리큘럼 전체에 걸쳐 예술과 인문학을 포함; (3) 세션 내 통합: 개별 수업이나 워크숍에서 예술 및 인문학 요소를 활용; (4) 과목 내 통합: 특정 과목 내에서 예술과 인문학을 포함.

이러한 통합 모델의 전제는 예술과 인문학이 본질적으로 의학교육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통합적 모델이 의학교육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FRAHME은 역량 기반 교육을 바탕으로 예술과 인문학을 의학교육과정에 통합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1999년 미국 졸업 후 의학교육인증위원회(the 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와 미국 의학 전문 자격 협회 (the American Board of Medical Specialties)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 의사의 6가지 핵심 역량과 연계되며 목표 지향적 결과를 강조한다[5]: (1) 의학 지식, (2) 환자 돌봄에 대한 기술, (3) 전문직업성, (4) 대인관계 및 의사소통기술, (5) 시스템 기반의 진료능력, (6) 진료 기반 학습과 자기개발.

이런 핵심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FRAHME에서는 예술과 인문학이 의학교육에 미치는 다각적 영향을 체계화했다. 주요 구성요소는 (1) 의학적 실천의 예술적 차원 강조, (2) 역량 기반 통합 교육모델 개발, (3) 평가체계 고도화, (4) 의료진 웰빙 지원프로그램 통합, (5) 학제 간 협력 강화 등 7대 권고사항으로 집약된다. 특히 이 모델은 의료인이 과학적 지식과 정서적 지능, 사회적 맥락 이해력을 동시에 함양할 수 있도록 ‘프리즘 모델(prism model)’을 교육설계 프레임워크로 채택했는데, 프리즘 모델은 (1) 관찰기술 향상, (2) 타인에 대한 이해 증진, (3) 자기성찰 역량 개발, (4) 사회적 옹호능력 강화를 4대 축으로 삼는다[5].

이와 같이 예술과 인문학을 의학교육에 구조적으로 통합하는 모델은 이전의 교육과정과 차별화된다. FRAHME은 예술(art)과 인문학(humanities)을 단순히 보조적 학습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의학교육 전반에 걸쳐 구조적으로 통합한다.

기존 모델이 주로 의과대학 교수진 중심으로 설계되며, 학제 간 협력이 제한적인 데 반해 FRAHME은 예술가, 인문학자, 창의적 치료전문가와 협력하여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행하며, 의료인문학이 포함되더라도 외부 전문가와의 협력보다는 내부 자원 활용에 초점을 두게 된다. 또한 기존 모델이 정서적 웰빙이나 전문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주로 기술 중심의 역량 개발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FRAHME은 의료인의 정서적 웰빙과 전문직 정체성 형성을 주요 목표로 설정한다. 학생들의 스트레스 관리나 공감능력 계발도 별도의 워크숍이나 선택프로그램 형태로 제공된다. 기존 모델은 사회적 책임이나 옹호능력을 별도로 강조하지 않으며 주로 임상기술 습득과 질병 치료에 초점을 두지만, FRAHME은 의료인이 사회적 책임을 이해하고 옹호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기존 모델은 주로 시험점수나 임상실습 평가를 통해 학습성취도를 측정하며 인문학 교육효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체계는 부족한 경우가 많았는데, FRAHME은 과정 평가, 결과 평가, 영향 평가를 포함한 다층적 평가체계를 도입하여 교육효과를 정량적으로 측정한다.

이 모델은 기존의 교육프로그램이나 혹은 의료인문학 교육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적용하기에 적절한 모델인지도 숙고가 필요하다.

한국적 맥락에서의 의료인문학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지칭하는 용어는 생의학(biomedicine)이다. 생의학은 근대 이후에 유럽에서 나타난 과학적 방법론, 특히 생물학을 배경으로 발전된 의학의 한 전통이다. 그래서 생의학의 특징은 유럽어, 특히 영어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성(universality)과 효과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의학이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의학을 바탕으로 진료가 이루어지는 실제 의료에 있어서는 지역성(locality)이 더 중요하게 된다. 생의학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이론과 실천체계를 갖고 있지만 의사는 특정한 지역시스템에 속해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의학을 교육하는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데 반해서 의사되기는 지역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17]. 특히 의료인문학 교육에는 이러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생의학에 대한 의료인문학적 접근은 보편성을 전제로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의과대학 안에서의 교육은 ‘한국’의 의료인문학 교육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의학도 그러하지만 특히 의료제도는 한국 사회와 문화의 특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제도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 혹은 의료인들과 보호자 모두가 한국이라는 특수성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이다. 결국 의학이 추구하는 인간중심주의는 결국 한국적 상황이라는 구체성 안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며, 이 지점에서 한국적 의료인문학의 필요성이 더욱 요청된다[18].

이러한 이유로 외국의 사례들이 참고할 예는 되겠지만 이들을 모방할 필요는 없다. 생의학 이전 시대에 고대에서부터 유럽 전통에서 의사(physician)는 철학적 개념을 통해 몸과 질병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일종의 인문학자였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대학 교육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이 전통이 이어져 근대 이후에도 유럽과 미국에서 ‘교양 있는 의사’라는 의사상은 의학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19]. 그러나 한국적 상황에서 의사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인문과 교양교육을 학부과정에서 마친 이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의학교육을 받는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과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통합 6년제 교육에서 의과대학은 학생들이 본격적인 의학교육에 들어갈 준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교육적 자원과 기회를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본질적으로 의과대학에서의 교육이 의사되기를 위한 것이라는 전제를 잊지 않는다면 의료인문학을 통해서 앞으로도 끈기 있게 다뤄야 하는 주제는 ‘한국의 의사’는 어떤 모습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의사는 하나의 지역에서 하나의 문화에 속해 있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딛고 서 있는 존재이며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은 이점을 고려한 지역성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의학교육의 본질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의사를 만들기 위해서 한국의 의료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다.

의료인문학: 부정적 상황을 수용하는 힘

위에서 제시한대로 의료인문학을 의학교육 안에서 실현하는 데 있어서 나선형 교육과정과 통합교육과정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의료인문학 교육과정을 의학교육의 다른 과정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과목의 학습역량과 핵심 내용을 규정하며 유형화하는 모형들을 제시하기도 한다[20]. 이러한 시도는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한국의 특수한 의학교육의 환경 속에서 의료인문학이 가진 인문학적인 요소들의 장점이 희석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 기반 교육이 담아내지 못하는 의료인문학 교육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의료인문학이 의사되기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하나의 인간이 의사가 되어가거나 의사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불확실하거나 부정적인 상황을 수용하고 견디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6]. 그래서 의학교육에서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접근으로 의학의 실천에 필수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학교육 준비과정을 포함한 의학교육 전 과정과 졸업 후 의학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21].

이런 역량을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은 시인인 존 키츠(John Keats)가 1817년에 언급한 개념으로, 예술가나 작가가 아름다움, 진리, 숭고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 모순, 신비를 수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22]. 그러나 한국적 개념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번역인 ‘소극적 수용력’보다는 ‘부정적인 상황을 수용하는 힘’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실과 이성에 대한 성급한 추구 없이 불확실성, 의심, 미스터리에 머물 수 있는 능력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는 능력, 혹은 증명이나 이유를 성급히 찾으려 하지 않고 불확실하거나 놀랍거나 회의적인 상태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23].

이와 대조적으로 근대 이후 생의학의 기본적인 작용방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량은 ‘적극적인 수용력(positive capability)’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종결짓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현대 사회와 조직에서 오랫동안 강조되어 온 개념으로, 특히 효율성과 성과를 중시하는 환경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적극적인 수용력의 특징은 (1) 주어진 상황에서 명확한 답을 찾고 실행 가능한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인 문제 해결 지향성, (2) 목표 달성을 위해 기존의 지식, 기술,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성과 중심적 접근, 그리고 (3)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데 중점을 두는 결정적 행동 등이다[24].

이러한 능력은 조직이나 개인이 제한된 시간과 자원 안에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주어진 자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게 된다. 또한 이는 위기상황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 역량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의 의학교육에서는 주로 적극적인 수용력이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역량 기반 학습이나 성과 기반 학습에서 말하는 역량과 성과는 모두 의료현장에서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의료현장에서는 단순히 적극적 수용력만으로는 복잡한 임상환경에 대응하기 어렵다. 적극적 수용력은 신속한 문제 해결과 실행력을 제공하며, 소극적 수용력은 불확실성을 수용하고 창의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바, 두 가지 능력을 균형 있게 개발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Table 2).

Key differences between positive and negative capability

소극적 수용력의 핵심 요소는 (1) 불확실성과 모호성에 대한 내성, (2) 기존의 고정된 개념이나 체계에 대한 거부, (3) 수동적 수용성과 개방성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개념은 문학뿐 아니라 의학, 교육, 리더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로 인식된다.

의학교육에서도 이 역량은 필요한다. 우선 이것은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높은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발휘해야 하는 중요한 능력이 된다. 동시에 환자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를 행하는 데 있어서 의료는 과학적 사실뿐 아니라 환자의 개별적인 경험과 맥락을 이해하는 예술적 측면을 포함한다. 소극적 수용력은 의사가 환자의 복잡한 이야기를 포용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현대 의학교육은 측정 가능한 역량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 임상상황은 표준화된 평가로 포착하기 어려운 역동성을 지닌다. 소극적 수용력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한계를 보완한다. 특히 글쓰기를 통한 성찰적 실천(reflective practice)을 통하여 의사는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감정적 부담을 관리할 수 있다[23].

의학교육 안에서 소극적인 수용력을 키우는 길은 매우 필요한 것이기에 현재의 교육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불확실성을 다루는 능력을 교육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강점을 지닌 것이 의료인문학이고 역량 중심 교육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임상실습과정에서도 의료인문학적 관점을 도입하여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25]. 학생들은 환자의 고통을 ‘안아주는(stay and watch)’ 자세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으며, 포트폴리오나 성찰일지, 동료와의 토론 등을 통해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성찰적 실천(reflective practice)을 적용해 볼 수도 있다. 특히 최근 주목받고 있는 서사의학을 교육과정에 적용함으로써 환자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도 있다. 이 접근법은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는데, 소극적 수용력은 이러한 목표에 부합하는 개념이고 궁극적으로는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학습의 목표를 세우거나 획일성을 바탕으로 시기별 성과를 측정하는 방식의 역량 중심 교육으로는 소극적 수용력을 충분히 발전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학습의 목표나 성과가 분명하지 않아야 하고 계량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답을 구하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서 문제 자체가 분명하지 않아야 하고 따라서 해답도 찾기가 어려운 교육과정과 학습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학생들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도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이 경우에는 학습의 성과나 학습에 대한 평가도 기존의 계량적인 체계와 다를 수 있다. 의료인문학이 가장 잘 담당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이다. 소극적 수용력이라는 관점에서는 학생들이 인문학과 예술의 틀을 통해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를 접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의학을 다시 한번 인간중심적으로 볼 수 있는 토대를 세우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의사, 환자, 가족, 그리고 동료 의료인을 포함하는 인간다움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의학을 재해석하게 된다면 의학교육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의학교육의 맥락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은 근대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생의학을 길지 않은 시간에 걸쳐 한국의 사회와 문화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료체계, 의료기관 그리고 의사를 비롯한 여러 구성원들이 직면해 온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생의학이 걸어온 길은 여러 가지에서 유럽이나 미국, 혹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달랐고 그 지향점도 특별한 점이 있다. 한국의 의료체계는 세계적으로 특별하며 한국의 의료기관과 한국의 의사, 한국의 환자는 세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특별함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의료인문학은 서구적인 인문학의 단순한 도입이나 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의학계가 당면한 여러 과제를 열린 관점에서 수용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인간다움의 개념에 근거하여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 동시에 한국 의료체계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모색도 의료인문학이 담당해야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이런 관점에 있어서 구성원들의 소극적 수용력은 필수적인 요소이고, 따라서 의학교육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의과대학생들은 대답을 찾기 이전에 정답을 고려하지 않고 적절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최근 이슈: 인공지능과 의료인문학 교육

의료인문학 교육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논의하고 싶은 것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최근의 정보통신기술 변화에 따르는 의료인문학 수업의 대응이다. 학생들의 수업과 평가 그리고 심지어 포트폴리오를 포함한 성찰훈련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과연 학생들의 성과물이 본인의 성찰과 노력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인공지능의 피상적 결과물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이 점을 간과한 채 의료인문학 수업과 평가를 진행하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의 진지한 성찰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선 인공지능이 생성한 결과물이 수업의 성과물로 제출되어 제한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학생들이 직접적인 고민과 성찰을 할 필요가 없어지며 정직과 신뢰를 비롯한 개개인의 전문직업성을 발전시키거나 실천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할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이런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내재되어 있는 편향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도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업과 평가방식은 모든 의학교육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강구되어야 하며, 특히 의료인문학은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포트폴리오나 서사의학의 경우에도 인공지능에 의해 작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의료인문학 수업은 우선 수업의 현장성을 강조점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방식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업에 있어서 실시간 토론과 논쟁학습을 통해 학생들의 즉각적인 사고와 반응을 유도하거나 롤플레이와 시뮬레이션을 활용하여 학생들이 직접 체험하고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강의실을 넘어서 현장을 기반으로 하여 학생들이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스스로 계획하고 다양한 연구방법을 직접 적용해보는 현장 기반 학습도 시도할 만하다. 더욱이 의료인문학 과제물을 통해 형성평가, 종합평가를 진행하는 방식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시험이나 과제 작성을 교실 내에서 수행하도록 하여 외부 도구 활용을 제한하는 현장 필기시험이나 최종 결과물뿐 아니라 아이디어 구상부터 초안 작성, 피드백 반영까지 전체 과정을 평가에 포함시키는 과정중심 평가, 그리고 학생들 개인의 개인적 경험이나 의견을 반영하게 하는 개인경험 연계 과제 등이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창적 과제 설계가 필요할 것인데, 다중 단계 과제, 즉 이전 단계의 결과를 다음 단계에 반영해야 하는 연속적 과제를 설계하여 과제에 다중 단계를 설정하거나 학생들의 현장 경험에 대한 성찰일지를 작성하게 하여 관찰과 성찰을 결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디지털 문해력 증진을 의료인문학 교육에 수용하여 수업의 내용에서 인공지능의 장단점, 윤리적 사용법을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인공지능의 한계점과 남용 가능성 그리고 이어지는 잠재적 위험성을 인식하여 윤리적 차원과 실용적 차원에서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의료적 인공지능 기술 활용에 있어 의사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에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결론

본 논문은 통합 6년제 의학교육체계 도입에 따른 의료인문학 교육의 새로운 역할과 방향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탐색하였다. 통합 6년제로의 전환은 단순한 교육과정의 재편이 아닌 의학교육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하며, 의료인문학은 이 변화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의과대학이 의학교육뿐 아니라 의사가 되기 위한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의료인문학은 이제 선택적 교양이 아닌 필수적 교육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의료인문학 교육의 핵심은 ‘의사되기’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이는 기술적 역량 향상이라는 도구적 가치뿐 아니라, 의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본질적 가치를 포함한다. 의과대학생들은 의료인문학을 통해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불확실성을 수용하며,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조화시키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의료인문학 교육의 방향성에 있어서는 나선형 교육과정과 통합 교육과정의 접근법을 활용할 수 있으며, 특히 AAMC의 FRAHME 모델이 제시하는 예술과 인문학의 구조적 통합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구체적인 통합모델과 수업과정에 대한 이해와 적절한 적용만으로도 통합 6년제라는 교육 틀을 바탕으로 여러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의 다양한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적 상황에 맞고 각 학교의 특수한 사명과 가치를 반영하는 의료인문학 교육의 개발이다. 생의학이 보편성을 가진다 해도 실제 의료는 지역성을 가지며, 의사는 특정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의료인문학 교육은 서구의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본 논문은 소극적 수용력 혹은 부정적 상황을 수용하는 힘의 개념을 통해 의료인문학이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다루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현대 의학교육이 주로 강조해 온 적극적 수용력과 문제해결 중심의 역량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할 중요한 능력으로, 복잡한 임상환경에서 환자 중심의 의료를 실천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소극적 수용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목표 설정과 성과 측정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불확실한 문제를 제시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학습환경이 필요하다. 의료인문학은 학생들이 인문학과 예술을 통해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를 탐구하며 인간 중심적 의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인공지능의 발전은 의료인문학 교육에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성찰과 공감능력 함양을 목표로 하는 의료인문학 교육이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피상적 결과물로 대체될 위험이 있다. 이에 대응하여 수업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과정 중심 평가를 도입하며, 디지털 문해력을 함양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통합 6년제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은 미래 의사들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능력, 불확실성을 다루는 지혜를 갖출 수 있도록 돕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의학이 본질적으로 과학만큼이나 인문학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의사되기의 여정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교육적 틀을 제공한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이 연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나 이해당사자로부터 재정적, 인적 자원을 포함한 일체의 지원을 받은 바 없으며,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이해상충이 없음을 선언한다.

Authors’ contribution

김신권: 논문설계, 문헌검색, 문헌분석과 논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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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Table 1.

Applications of 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Art form or subject Possible extensions to teaching and learning in medicine
Literature A group of health professionals reads and discusses fiction and nonfiction literature that informs clinical practice, teaching, and learning.
Narrative medicine Students participate in facilitated, small-group sessions of “close reading,” learning how to thoughtfully and critically analyze a text and translate learnings to close listening with patients.
Theatre and drama Students practice active improvisation techniques that demonstrate listening without interruption and judgment.
Film and television Students and patients view a film about patients’ experiences with health and discuss inequities in care, bias, and stigma.
Music Faculty take lessons by music teachers about effective coaching, observation, lifelong learning, feedback techniques, mindfulness, and more.
History Interprofessional learners read and discuss seminal works about the historical context of race and the effects of institutional and structural racism on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Religion and spirituality Residents engage in “reflection rounds,” a small-group activity in which learners consider the influence of patients’ spiritual or religious beliefs on their illness experience.
Dance and movement Students engage in dance and movement exercises to express emotion, reduce stress, and connect with patients.
Reflective writing Students write reflective statements to learn from a critical incident or construct written tributes to anatomical donors and share them with the donors’ family members
Creative writing and poetry Students and residents write, share, and discuss 55-word creative stories about impactful experiences.
Visual arts and thinking strategies Interprofessional health care clinicians and learners view a work of visual art and engage in a facilitated discussion about the work, making connections to their own clinical practice.
Comics and graphic novels Students create and share their own stories about formative experiences in creative comic form.

From Howley L, Gaufberg E, King B. The fundamental role of the arts and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Internet]. Washington (DC): 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2020 [cited 2025 Apr 10]. Available from: https://www.aamc.org/about-us/mission-areas/medical-education/frahme [5].

Table 2.

Key differences between positive and negative capability

Feature Positive capability Negative capability
Focus Problem-solving and execution Acceptance of uncertainty and ambiguity
Approach Utilizing existing knowledge and skills Exploring various possibilities with an open mind
Decision-making speed Quick decision-making Postponing decisions for deeper exploration
Applicable situations Situations with clear goals Complex and ambiguous problem situ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