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어 베러 월드
In a Better World (Haevnen)
Article information
[교육자료: 영화]
영화 제목: 인 어 베러 월드
감독: 수잔 비에르
개봉일: 2011년 6월 23일(대한민국)
인 어 베러 월드(원제: Haevnen)는 2011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유럽 영화상 감독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덴마크의 수잔 비에르 감독의 작품이다. 수잔 비에르 감독은 1991년 ‘집을 떠나는 프로이트’로 데뷔하여 딜레마 삼부작으로 불리는 ‘인 어 베러 월드,’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세컨 찬스’로 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바 있는 유럽의 중견 여류 감독이다.
‘용서와 복수’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두 가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작은 사고를 다루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의 피난민 구호소에서 봉사하고 있는 의사 안톤(미카엘 페르스브란트 분)은 역시 같은 의사로 덴마크 국내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마리안느(트리네 뒤르홀름 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첫째인 엘리아스(마르쿠스 리가르드 분)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부모는 일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클라우스(울리크 톰센 분)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아들 크리스티앙(윌리엄 요크 닐센 분)은 의연히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다.
이야기는 크리스티앙이 엘리아스의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전개된다. 불의에 ‘복수’하고자 하는 크리스티앙은 왕따를 당하는 엘리아스를 구해주고, 둘은 가까워진다. 한편 아프리카 구호소를 긴장시키는 인물이 있으니, ‘빅 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지역 갱단의 두목이다. 그는 부하들과 임산부 태중의 아기 성별 맞추기라는 끔찍한 내기를 하며, 그 때문에 배를 난자당한 소녀들이 구호소로 급히 실려오는 것이다. 안톤은 소녀들을 살리기 위해 응급으로 수술을 하곤 하지만 모두를 살리지는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갱단이 구호소로 쇄도하고, ‘빅 맨’은 안톤에게 자신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한다. 구호소의 모두가 치료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나, 안톤은 치료해주기로 결정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의료 전문가로서의 사명이라고 여긴 것일까.
또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귀국한 안톤은 두 아들과 크리스티앙을 데리고 부두로 놀러 간다. 그 곳의 놀이터에서 막내가 다른 꼬마와 가볍게 다투게 되고,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꼬마의 아버지에게 모욕을 당한다.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앙은 이를 갚아줄 것을 주장하나, 안톤은 오히려 꼬마의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 의연히 마주하며, 오른뺨을 내어주고,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소. 나는 당신이 무섭지 않소. 멍청한 것은 당신이요.’라고 말하며 아들들이 악에 ‘복수’가 아닌 ‘용서’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두 아이, 특히 크리스티앙은 주도적으로 ‘복수’를 계획하게 된다.
영화는 두 개념을 형상화한 인물—용서의 안톤, 복수의 크리스티앙—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 같지만, 두 인물의 서사를 꼬아놓아 그것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다. 안톤은 용서를 상징하지만, 나중에 결국 ‘빅 맨’에 대해 더 잔인한 복수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티앙은 복수를 상징하지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용서와 구원을 기다린다. 또한 영화 초반부에 죽어가는 임산부를 살리는 안톤과 죽은 어머니를 애도하는 크리스티앙을 교차 편집으로 제시함을 통해 감독은 용서와 복수가 종이의 앞뒷면일 수 있음을 그리려 한다. 그렇기에 용서와 복수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항은 딜레마로 만난다.
구호소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 안톤은 영웅이지만, 그는 아들의 왕따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잠깐의 외도로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있는 상태이다. 더불어 안톤이 당면한 갈등상황에서 내리는 선택들은 당장은 숭고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의 결과를 볼 때 오히려 그 숭고함은 공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히려 그의 영웅적인 행위들 때문에 나중의 문제들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왕따에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던 엘리아스를 ‘구원’하는 크리스티앙 또한 양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멋지게 친구를 구해내는 그는, 어머니가 임종에 가까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알지 못한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돕지 못하고 화를 냈으며, 어머니를 미워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증오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겉으로는 용감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태도를 취하는 크리스티앙은 안으로 깊은 상처를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갈등의 최고조에서 크리스티앙을 정말 ‘이해’하는 것은 안톤이다. 그는 크리스티앙을 품고, 자신이 보고 경험한 죽음에 대한 이해를 크리스티앙에게 전달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최종적으로 복수와 용서의 뒤얽힘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의 유머 작가이자 수필가였던 조쉬 빌링스가 남긴 “용서만큼 완벽한 복수는 없다”는 경구를 떠올려 보자. 이 표현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용서하는 것을 통해 철저한 복수가 가능하다는 식의 단순한 해석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런 해석은 복수를 위한 용서라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으로 빠지고 만다.
오히려 용서와 복수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 Q정전>의 아 Q의 비법, ‘정신승리’일 뿐일 지도 모른다. 반면 용서 없는 복수는 죄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 끊임없는 갈등을 반복할 뿐인 폭력일 수 있다. 복수할 수 있지만 용서를 말하는 것,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정의롭지만 사람은 용서하는 태도가 진정한 용서이자 진정한 복수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계속 딜레마로 남아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영화를 통해 학생들은 ‘정의’를, 그 앞에서의 딜레마를 고민하게 된다.
의학교육의 현장에서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직 의료현장을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에게 전문직업성의 정의, 구성요소를 가르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의 나열로 귀결되기에 좋은 접근방법은 아닌지도 모른다. 사례 중심으로 교육을 해도 사례는 인물이 아닌 사건을 다루게 되고, 따라서 전문직업성에서 말하는 전문가는 현실과는 유리된 이상적인 조건의 합으로 다뤄지기 쉽다. 갈등상황에 대해 늘어놓고 같이 고민하곤 하지만 학생들이 내어놓는 답은 어딘가 어색하다.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숭고한 전문가들의 이야기들, 와 닿지 않는 고민들이 피부로 체감되기는 너무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윤리수업을 구상하면서 이 영화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도 반가웠다. 영화는 안톤을 통해서 전문직업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전달하고 있었다. 전술한 것처럼 안톤은 영웅이지만 우리가 늘 만나는 이웃이기도 하며, 그의 신념은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영화를 보면서 학생들이 그 지점을 같이 느낄 수 있다면 나의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학생들에게 잘 가닿을 것이라고 느꼈다.
더불어 학생들에게 갈등 사례를 제시하기 위한 소품으로 영화는 도움이 된다. ‘의사로서 누구나 미워하는 악한을 치료해야 하는가?’ 또는 ‘테러리즘의 시대에 의사는 복수 또는 테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하는가?’와 같은 토론주제를 던질 때 영화는 갈등을 설득력 있게 비추고, 학생들이 고민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다리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시화되면서 나타난 의사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과 영화를 관련지어 논의해볼 수도 있다. 다수의 의사가 알고리즘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다소 우울한 주장 앞에서 주목할만한 답변 중 하나는 ‘침상의학의 혁신(renovating the bedside medicine)’일 것이다. 그것은 병자와 같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의사, 고통의 순간에 동참하는 의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해줄 것이 없어 그저 고통을 함께 감내하기만 해야 했던 19세기로의 회귀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가 누리게 된 것을 통해 환자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에 항상 내재하는 불확실성을 마주하여 환자와 같이 폭풍을 견디어 내는 것.
엘리아스의 위기의 순간, 그를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안느는 동료 의사에게 말한다. ‘같이 있어 주세요, 제발.’ 크리스티앙의 상처에서, 엘리아스의 아픔에서, 안톤의 고뇌에서 마리안느의 말은 같이 공전한다. 영화는 고통의 순간에서 함께함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침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의과대학 학생들에게도 이미 수많은 밤을 지새워본 의사들에게도 영화는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울림을 전달한다. 침상의학의 혁신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구호를 넘어 지금 의료현장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외침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이 울림은 훌륭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