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그의 언어를 가질 것인가 : 의사 수필문학상을 통해 보는 의사의 말, Narrative Medicine
Could the Doctors Have Their Own Language? : Doctoring through Doctorʹs Essay, Narrative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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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 임상실습현장에서 학생들과 의료 의사소통(medical communication)에 관련해 자주 받아온 질문이 있다.
“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환자에게 ‘개방형 질문’으로 문진하도록 배웠습니다. 그런데 실제 CPX (clinical performance examination) 시험을 치르거나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날 때 개방형 질문은 너무 광범위하고 비효율적으로 생각됩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폐쇄형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건가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가정폭력이나 나쁜 소식 전하기와 같은 사례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제가 직접 겪어본 일이 아니라서 형식이 아닌 진심으로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일도 공감할 수 있나요?”
언어(言語)는 인간의 기호와 상징체계로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문자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관습적인 체계로 정의된다. 의사가 의료현장에서 경험하는 생각과 느낌은 치료적 관계(rapport)의 구성요소가 된다[1]. 바탕에 어떤 문화가 있는지, 어떻게 환자와 관계 맺는지는 치료순응도와 직결된다. 때문에 의사는 유려한 언어구사자, 소통가가 되어야 한다.
내러티브 의학(narrative medicine)은 임상실습, 연구 및 교육에서 사람들의 서사를 활용하는 의료 접근방식이다. 증상만이 아니라 환자의 개별 이야기로 치료하는 시도로 신체적 질병과 동시에 발생하는 관계 및 심리적 차원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2]. 내러티브 의학은 환자의 경험을 검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사의 창의성과 자기성찰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외에서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연중 강의 및 세미나에 추가된 석사과정, Albert Einstein College의 대학병원인 Montefiore Medical Center의 가정의학/사회의학의 하위과정으로서 내러티브 의학 교육과정 등이 있다. 이들 교육과정을 통해 전공의들은 스트레스, 손실, 균형 등의 주제뿐만 아니라 공감을 강화하기 위해 개인 서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오하이오주립대학 인문연구소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더 공감적이고 동정심 있는 보살핌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한다. California University of Irvine College of Medicine 가정의학과의 통합의학 프로그램(integrative medicine program)은 건강, 예방 및 자가관리기술을 강조하는 다방면의 환자 중심적 접근방법을 포함하여 전공의, 의과대학생 및 교수진을 위한 의료 및 의학교육의 초점을 바꾸고, 최적의 치료환경을 제공하고 있다[3]. Western University는 2011년 NMI (Narrative Medicine Initiative)를 창안했으며 “어떻게 이야기 예술이 건강관리 교육을 향상시키고 환자치료 경험을 향상시키는가?”와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학부, 대학원 등에 내러티브 의학을 도입했다. Lenoir-Rhyne University는 Thomas Wolfe Center for Narrative를 설립하며 ‘조각난 세계에 서사를 요구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Saybrook University는 심신의학 프로그램을 통해 내러티브 의학에 접근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의과대학은 이와 관련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데 척박한 환경이나 예외적으로 내러티브 의학이 드러나는 기회가 있다. 바로 의사문학상의 형태로 공개되는 의사 수필이다. 올해로 16회를 맞은 한미수필문학상은 의사직을 대상으로 공모되는 문학상으로 매년 여러 개의 선정작을 시상한다. 주최측은 이와 같은 문학상이 의사들의 생생한 삶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며 의사라는 사명감과 어려운 치료과정을 이겨낸 환자들의 심정을 교감함으로써 동반자적 관계 및 예술발전의 동력이 되도록 한다는 목표를 천명했다[4].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은 심사평을 통해 ‘의사와 환자의 가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치’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 가치는 의사라는 직군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평했다.
과연 의사 수필에 드러난 의료 의사소통의 모습은 내러티브 의학에 해당하는 효과를 지닐 것인가? 간접 경험으로서 의사문학의 형태가 직접 경험하는 의료현장에 대한 교육적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수상작의 사례를 고찰해보자.
절대 동요하지 않으리라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들어왔건만, 허사다. 다양한 종류의 복막염 환자를 마주하면서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다고 자부했지만, 누워 있는 환자가 크론병이다 보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배를 내가 가르는 기분. 내 뱃속에 똥이 새고 있는 듯한 오싹함. 여느 수술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손끝의 미세한 떨림과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나 자신에게까지 숨길 방도는 없다. 대체 나는 왜 외과 전문의가 되어 또 하필이면 대장항문을 세부전공으로 선택하여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것인지. 패혈성 쇼크상태로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물론이거니와 불현듯 떠올라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오만 가지 잡생각과도 사투를 벌이고 나니 수술은 무사히 마쳤으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 제16회 장려상 수상작 ‘교감’(이수영/화순전남대학교병원 외과)
글쓴이는 자신이 크론병으로 진단된 외과 전문의다. 본인이 앓고 있는 질환을 진단받은 환자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의사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체화된 동질감을 느낀다.
환자의 보호자와 상의해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병실을 옮기고 싶지도 않고 호스피스라는 말도 싫으니 다시 그런 이야기 꺼내지 말아 달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부담스러우면 회진도 안 오셔도 되니 호스피스 이야기 꺼내지 마시고 지금처럼 필요할 때 진통제만 놓아 달라고 하신다. 아, 나의 무력감을 눈치 챘단 말인가. 이런 환자야말로 호스피스가 더 필요하리라 생각했지만 더 말하지 못했다. 환자는 아침, 저녁이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어디를 봐야 할지,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이제 말을 못하는 환자는 물론이고 보호자에게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 자책, 무능, 무력. 병실 들어가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 제16회 우수상 수상작 ‘죽음을 배우다’(이근만/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내과)
의사를 비롯해 인류를 압도하는 고유한 경험 중 하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매회 빠지지 않고 수상하는 의사문학상의 단골 주제다. 중환을 돌보는 의사는 보통 죽음을 적대시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만, 어쩔 수 없는 순간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특히 의사의 무기력과 좌절감은 극대화된다.
작은 사마귀 하나도 치료가 힘든데, 손바닥 전체를 다 점령한 사마귀에 대한 치료는 막막했고 내 첫 번째 선택은 회피였다. 손바닥을 다 도려내거나 딴 살을 떼서 이식을 하는 게 가능할리 없었지만 난 그를 정형외과로 보내버렸다. 폭탄 돌리기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땐 그냥 피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환자가 그러다 지쳐 딴 병원으로 가버렸으면 했다. — 제16회 대상 수상작 ‘악수’(김원석/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긍정적인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다양하고 무거운 책임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의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을 유지한 의사는 마침내 환자의 치료적 목표에 가까워지며 내적 변화를 겪는다.
아무 대화 없이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가 떨궈지고 있었다. 나도 감정이 복받쳐 왔다. 2년 이상의 치료 동안 사적인 대화나 서로를 알기 위한 교감의 시간이 있었던 거 같진 않다. 친하기엔 나이 차도 나고 서로 치료에 지쳐 지긋지긋했던 사이였는데…… 뭐랄까? 표류하는 배에서 살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사람들 간에 느끼는 감정이 이런 걸까 싶었다. 고맙거나 감사한 것보단 그냥 포기하지 않았던 서로에 대한 대견함 그런 감정 말이다. — 제16회 대상 수상작 ‘악수’(김원석/강북삼성병원 피부과)
의사는 오열하며 환자를 통한 배움에 겸허히 감사하기도 한다.
엉엉. 또 울어버렸다. 네, 가족분들, 저도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아툴 가완디한테, 그리고 우리 할머니께,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아직 젊은 내과 의사가 죽음이 뭔지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렇게 김성구 환자분 보내드려서 가족들께서 편하시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 제16회 우수상 수상작 ‘죽음을 배우다’(이근만/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내과)
의료현장의 서사(narrative)는 그 자체가 진료의 일부이며 치료의 과정이다. 동시에 전문직업인으로서 의사가 성장하는 토양이다. 그러나 그 특별하고 총체적인 경험은 자주 가려져 있으며 때로 굳건한 신뢰 속에 영원한 비밀이 된다. 의사 수필은 의료정보가 담긴 단순한 감상기가 아니다. 인간 사이에서 공유되는 무형의 자산이다. 기계어로 통역되기 어려운 경건한 생명의 언어다. 의사는 그 언어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