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Med Educ Rev > Volume 11(2); 2009 > Article
조금 더 큰 의사들

Abstract

박형우의 책『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는 한국에 서양의학이 처음 도입되는 단계에서부터 제중원의학교의 설립 과 운영, 1908년에 첫 면허의사가 배출되는 과정, 관(官)에 의해 이루어진 의학교육의 양상, 그리고 최초로 면허를 수여받은 의사들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각 내용들을 총 5부로 나누어 차례대로 살펴본다. 이는 의료인이 국가의 제도적인 틀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과 맞물려 있다.
저자는 근대 서양의학 도입과 의학교육의 양상을 미시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으며, 꼼꼼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주력한다. 또한 저자가 의학사 연구의 여러 쟁점들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입체적 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진행형이다.
저자는 특히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첫 졸업생들이 받은 의술개업인허장의 의미와 우리나라 최초 면허 의사들인 그들의 활동에 주목한다. 그들은 서양의학의 토착화에 관심을 가졌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1910년 이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 에 눈 감지 않고 그것에 정면으로 대응하려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활동은 사회의 변화에 무관심한 오늘날 의료인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으로서 제시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의미에서『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는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

REFERENCES
박형우『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
The Early History of Modern Medical Education in Korea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궁금해하기 마련이 다. 그리고 항상은 아니지만, 살다가 가끔씩은 자신보다 앞서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존재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필자는 9 만 번 대 의사면허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종종 필자에게 술잔을 모두 비우기를 강권하시는 이 책의 저자 박형우 교수님은 2만 번 대 의사면허의 소유자이시다. 교수님께서 가끔씩 면허 번호를 비교하시면서 필자에게‘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하실 때면, 우선은 내일의 숙취가 걱정되지만, 한편으로는 필자보다 앞서서 의사면허를 받은 사람들, 더 나아가 교수님보 다도 더 먼저 의사면허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느껴지곤 한다. 그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또 그 분들은 어떤 것들을 공부했을까. 필자를 그토록 괴롭혔던 과목들을 그 분들도 똑같이 공부했을까. 필자가 느꼈던 많은 고민들과 의문들을 그 분들도 느꼈을까. 그 분들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박형우 교수님도 술잔을 모두 비워야 하는 게 아닐까. 박형우 교수님의 책,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공해준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와 같은 호기심 외에도, 우리가 우리나라 초기 의사들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는『닥터 골렘』1)에서‘과학’으로서의 의학과‘구원’으로서의 의학을 구분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차원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로‘플라시보 효과’2)를 든다. 이것은, 이 효과로 인해 혜택을 본 개인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겠지만, 분명 과학으로서의 의학에게는 커다란 낭패이다. 그리고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의 존재는‘가짜 의사’의 (생물학적으로 의 미가 없어 보이는) 의료행위나 대체 의료 체계가 끈덕지게 살아 남는 이유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3) 여기서 필자가 의문시하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진짜 의료와 가짜 의 료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의 우리는 큰 고민 없이‘의사들이 하는 행위’를 진짜 의료로 구분한다. 그 외 다른‘가짜 의사’들의 행위는 사이비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진짜 의사’를 갖게 되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법적으로‘진짜 의사’의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하고 또한 동시에 ‘가짜 의사’를 단속할 수 있게 된 시점은 언제 부터일까? 이 시점은 의료인이 국가의 제도적인 틀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우(이하, 존칭 생략)의 책,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 특히 이 책은 1908년 첫 면허의사가 배출되고 이들이 활동했던 1910년 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을 다루고 있다.4) 따라서『한국 근대서양의학교육사』는‘진짜 의사’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은 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립되는 과정과 그러한 배경을 토대로 서양의학 교육이 이루어진 과정 그리고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선, 서양 근대 의학의 도입과 의료인의 양성, 그리고 의료인에 대한 법규의 정비와 관련된 선행연구들을 살펴보자. 여인석5) 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의사면허제도가 도입·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한다. 그는 의사들의 분화와 경쟁이라는‘내부적’요인과 국가적 단위의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필요라는‘외부적’요인, 이렇게 두 가지의 요인들을 중심으로 우리나 라 의사면허제도의 도입 과정을 평가한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서양 의료를 행하는 의사들이 스스로의 자율적인 노력을 통해서 의료권을 쟁취한 게 아니라, 국가(조선총독부)가 일방향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박윤재6)는 일제 초 서양 의학교육 기관이었 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朝鮮總督府醫院附屬醫學 講習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세브란스의학교 등이 설립되고 변화해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당시 의학 관련 법제(의사규칙醫師規則, 의사시험규칙醫師試驗規則, 의생규칙 醫生規則, 약품급약품영업취체령藥品及藥品營業取締令등)가 정비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는 특히 의료인과 관련된 법규들이 반포되고 정비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공권력(조선총독부)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기존의 연구들7)이 이처럼 의료 법제의 정비와 같은 거시적인 측면에서 근대 서양의학 도입과정의 성격을 살피려 했다면, 박형우의 책『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가 갖는 특징은 그 과정의 미시적인 측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미시적인 측면들을 보여주는 예들로는, 학생들의 인적사항이나 당시 교재로 쓰였던 의학 교과서들의 내용 등에 대한 분석을 언급할 수 있겠다. 특히 의학교과서에 대해 분석하는 부분에서는 각 교과서들의 서지학적 특징, 번역 본과 원본과의 차이, 책의 크기와 분량, 심지어는 책의 정가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는 꼼꼼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재 구성하는데 주력한다. 가령,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이었던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 대한 언급, ‘제중원의학교’ 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 과정을 일 년 단위로, 즉 1886년, 1887 년, 1888년, 그리고 1890년으로 세분하여 설명하는 부분, 에비슨이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의 졸업식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 그리고 의학교의 설립과 운영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등에서 당시의 당황을 상세히 재구성해내려는 저자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이 책『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는 매우 입체적인 면모 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 책은 한국 서양의학 수용과 관련된 논의의 지형 속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지점들을 서술하는 대목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는 이 책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다. 즉,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는 현 시점에서의 여러 쟁점들에 대한 구체적‘개입’으로서의 의의를 지니며, 따라서 현 재 진행형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특히 잘 드러나는 부분들은 다 음과 같다. 즉, 제중원의 설립과정과 그 운영주체를 설명하는 대 목에서 제중원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부분, 의학교8)의 설립과 관 련하여 의학교 규칙의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이나 당시 교관의 자질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 주제와 관련 된 논쟁의 지형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책,『 한국근대서양의 학교육사』를 읽으면서 충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이 책은 한국에 서양의학이 처음 도입되는 단계에 대한 부분에서부터 최초로 면허를 수여받은 의사들의 활동을 담은 부분까지 총 5부로 이루어져 있다.
  • 제1 부 한국의 서양의학 도입

  • 제2 부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 - 제중원의학교

  • 제3 부 조선정부 - 통감부 - 조선총독부에 의한 의학교육

  • 제4 부 선교부, 동인회 등에 의한 지역별 의학교육

  • 제5 부 한국 최초 면허의사들의 활동

제1부에서는 한국에 서양의학이 소개되어 들어오는 과정을 서술한다. 처음에는 여러 서양의학 서적들을 통해서 그리고 실학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의학지식이 조선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술이 도입된 것은 알렌에 의해 제중원이 설립된 이 후의 일이다.
제2부에서는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제중원의학교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이 바뀐 후 1908년에 첫 면허의사가 배출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제중원의학교에서 의학을 배운 최초의 의학생들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초창기 한국인 의사들9) 그리고 한국어로 된 의학교과서의 편찬 과정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제3부에서는 관(官)에 의한 의학교육을 다룬다. 1899년 조선 정부는 의학교를 세웠는데, 이 의학교는 통감부 시기 1907년에 대한의원이 설립됨으로써 그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3부에서는 이 시점까지 의학교에서 어떠한 의학교육이 시행되었는지를 고 찰한다. 이어서 의학교가 폐지된 후에 대한의원 교육부, 대한의원 의육부,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개칭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들이 있었는지 차례로 살펴보고, 이 때 편찬된 의학교과서도 함께 정리한다. 더불어 의학교 졸업생들이 졸업 후 어떠한 활동들을 하였는지 살펴본다.
제4부에서는 각 지역에서 선교부에 의한 의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동인회의 의학교육 동향은 또한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이에 덧붙여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한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의사면허’ 가 부여되기 전까지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44명 이었는데, 이들의 인허장 번호, 이름, 출신교, 수여일, 주요 활동지를 표로 정리하고 있다.
마지막 제5부에서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하 고 최초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한국 최초 면허의사 7명의 활 동을 정리한다. 이들의 활동을 제2부에서 다룬 제중원의학교 졸업생들과 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의사들, 제3부에서 살펴본 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의 활동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1) ⑴ 서양의학의 도입과 최초 면허 의사의 배출까지

조선이 처음 서양의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실제 의술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진 서양의학 서적을 통해서였는데, 당시 조선에 소개되어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책은 독일인 예수교 선교사 샬폰벨의『주제군징(主制群徵)』(1629)이었다. 이 책은 갈렌 (Claudius Galen)의 해부생리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서양의학 서적이다. 또한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Benjamin Hobson, 合信)이 저술한『전체신론(全體新 걩)』(1851),『 박물신편(博物新編)』(1855),『 서의약론(西醫겫걩)』 (1857), 『내과신설(內科新說)』(1858) 및『부영신설(婦新說)』 (1858)도 있었다. 이외에도 이익, 이규경, 정약용, 최한기 등의 실학자들이 의학서적에 큰 관심을 보여 서구의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실제 의료 활동 과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일부 학자들의 개인적 호기심에 그쳤다.
1885년에 알렌에 의해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되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술이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된다. 또한 1885년 1월 27일 알렌이 제출한 병원설립안에는 이미 의학교육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헤론의 부임과 더불어 알렌은 본격적으로 의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드디어 1886년 3월 29일 16명의 학생으로 의학교가 개교하였다. 최종악, 이겸래, 이진호, 이의식, 윤호, 진학순, 상소, 김의환 등은 한국에서 의학을 최초로 교육받은 의학생들이다.
그러나 알렌이 제중원을 떠나고 제중원 의학교에서의 교육은 그 결실을 맺지 못한다.10) 그러다가 1893년 11월 에비슨이 제중원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제중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고 의학교육은 재개된다. 에비슨은 의학교육의 기본이 되는 의학교 과서, 특히 한국어로 된 의학교과서의 부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번역을 진행하였는데, 이렇게 출판된 당시의 의학 교과서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 중 하나이다.
알렌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22년이 지난, 그리고 에비슨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10여 년 만인 1908년 6월 3일, 7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수여된‘의술개업인허장’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의사 면허제도의 도입사를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11)
사실, 의료인은 과거에서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의사’는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 할 수 있게 되었다.12) 대한제국 시기에 의료인의 기준 마련을 위해 제정한 규칙은 1900년 1월 2일 의사규칙(醫士規則), 약제사 (藥劑士) 규칙, 약종상규칙(藥種商規則)으로 반포되었다.13) 의사 규칙(醫士規則) 제1조는 의사(醫士)를 종래 한의사들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제2조에서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장을 가지고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의사로 규정하고 이들 외에는 의료행위를 금하고 있다. 즉, 1조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한의들에 대한 규정이고, 2조는 장차 배출될 미래의 의사들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통감부 시기에는 의사면허 와 관련된 법령이 새롭게 제정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의사면허 에 해당하는 의술개업 인허장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의술개업 인허장은 1908년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수여되었다. 이렇게 발급된 의술개업인허장은 1913년 11월 15일에 의 사규칙(醫師規則)에 의해 의사면허증이 주어질 때까지 발급된다.15) 의사규칙은 치과의사규칙(齒科醫師規則), 의생규칙(醫生 規則), 공의규칙(公醫規則)과 함께 발표되었는데, 이 의사규칙은 의사의 이름을 가지고 의료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 기준14)을 명확히 하였고 아울러 의사의 의료 활동에 대한 각종 의무조항들을 규정해 놓았다. 이를 통해 의사자격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었고, 종래 일정한 자격 없이 자의적으로 의료 활동을 해 오던 무자격 의사들에 대한 단속이 가능하게 되었다.16)
이와 같이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첫 졸업생이 받은 의술개업인허장은 그것을 수여받은 자의 자격에 대한 공인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이며, 이는 의료 분야에서 근대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원래 한국에 서양 의학이 어떻게 도입되었고 그 산물로 배출된 최초의 면허의사 7 명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 7명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2) ⑵ 관립 의학교육

그러나 저자는 관립 의학교육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에 대한 평가도 잊지 않고 있으며, 이 책의 제3부를 통해 이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조선정부는 1899년 의학교와 내부병원(1900년, 광제원으로 개칭)을 설립하였다. 3년 과정이었던 의학교는 일본인 교사와 한국인 교관의 잦은 교체, 재정난 등으로 그 운영이 순조롭지는 못했지만, 3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의학교 졸업생은 제1회가 19명17), 제2회가 13명, 제3회가 4명으로 모두 36 명이었다. 그러나 의학교는 통감부 시기인 1907년에 대한의원의 설립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 이후 관립 의학교육의 흐름은 대한의원 교육부와 의육부로 이어지게 된다. 대한의원 교육부에서는 제1회 13명, 제2회 5명으로 총 18명이 졸업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졸업장을 받았지만 대한의원 제2회 졸업생들에게만 의술 개업인허장이 수여되었고, 이후에 의학교와 대한의원의 이전 졸업생에게도 인허장이 수여되었다. 의학교 졸업생들과 대한의원 졸업생들은 졸업 후 진로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자혜의원의 설립에 기인한다. 대한의원 졸업생들은 대부분 자혜의원 조수로 근무하였던 반면, 의학교 졸업생들은 의학교 교과 및 군의, 혹은 필요에 따라 임시위생원 의사, 유행병 예방의원 등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된 이후, 의학교육과 관련된 여러 제반 상황들도 함께 변화를 겪게 된다. 대한의원에서 의학교육을 담당하던 교육부·의육부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조선총독부의원부속 의학강습소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러나 1914년 3월 의사규칙의 반포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는 사립 의학교육기관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조선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는 시험 없이 의사면허증을 수여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브란스와 같은 사립 의학교 졸업자들은 종전과 달리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를 받지 못하고 의사시험을 보아 합격해야 하는 불평등한 조건을 강요받았다. 이 시점부터 관립이 사립에 비해 우위에 서게 된 것이었다.

(3) ⑶ 한국 서양의학교육의 두 흐름

선교부에 의한 의학교육은 미 북장로회, 미 북감리회, 미 남감리회, 미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영국성공회, 제7일 안식일 재림 교회 등 다양한 선교부에 의해서 각 지역별로 이루어진다. 미 북장로회는 평양, 대구, 선천, 재령, 청주, 강계에서, 미 북감 리회는 서울, 평양, 공주, 해주에서, 미 남감리회는 개성, 원산, 미 남장로회는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캐나다장로회는 함흥, 성진 등지에서 각각 활발하게 의료사업과 의학교육을 진행하였다. 특히 1905년 평양에서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합동으로 진행된 의학교육의 결과, 10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 러나 1908년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에게 최초 의사면허가 부여되자 선교사들은 1908년 조선의료선교사협회를 개최하여 각 교파의 선교의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합의학교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고, 이를 통해 1913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그 명칭을 바꾸게 된다.
한편 당시 일본은 동인회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의학교육 활동 을 전개해나간다. 동인회는 평양, 대구 및 용산에 동인의원(同仁 醫院)을 개원했다. 특히 평양동인의원부속 평양의학교에서는 비교적 조직적인 의학교육이 이루어져 8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기도 했지만, 동인의원은 결국 자혜의원으로 흡수되면서 의학교는 폐교되었고, 학생들의 일부는 조선총독부의원부속 의학강습소에 편입한다.
이렇듯 선교부와 동인의원에서의 의학교육은 이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와 조선총독부의원부속 의학강습소로 그 맥이 이어져, 한국의 서양의학교육의 큰 두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 의사들은 사회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의사들의 이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대안으로서 우리나라 첫 면허 의사들 7명의 활동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일독을 권한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는 대신, 그들의 활동을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 이들 7명의 첫 면허 의사들의 활동이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부각될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서양의학의 토착화에 관심을 가져 후진 양성에 힘썼다. 김필순과 홍석후 및 홍종은은 에비슨을 도와 거의 전 과목의 한국어 의학교과서를 출판하였다. 또한 주 현측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모두 의학교에 남아 의학 교육에 매진하였다. 특히 김희영과 신창희는 간호원양성소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홍석후는 동창회를 조직하고 학감 등을 역임하는 등 학 교의 발전을 꾀했다.
둘째, 7명의 첫 면허 의사들의 활동이 갖는 또 다른 의의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1910년 조선이 일본 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김필순, 박서양, 신창희, 그리고 주현측 은 몽고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필순은 학교에 남아 모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병원 경영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이태준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학교에 남아 화학과 해부학, 외과학 등을 가르쳤던 박서양은 세브란스가 전문학교로 승격될 즈음 학교를 사직하고 간도로 떠났다. 간도에서 박서양은 구세병원(救世病 院)을 개업하였고 또한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여 학생들 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신창희는 1920년대 주로 안동과 상해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2월 폐렴으로 사망하기까지 동몽골 지역에서 의사와 지역 교회 신자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주현측은 3·1 운동 때 33 인 중 한 명인 목사 양전백(겳甸伯)에게 감화되어 이후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는데, 1911년‘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선천으로 돌아온 주현측은 상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로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고, 『대한민국신보(大韓民國新報)』라는 신문을 제작하 여 신의주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일제 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피신한 그는 1925년 귀국하기까지 신한 청년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흥사단 조직과 의료선교활동에 참여했고, 귀국 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특히 국가 존폐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지금의 의대생들에게 이들의 활동은 과연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까. 임상적 상황에 주안점을 두어 발달된 최신 의학 기술을 교육 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의 의학교육은 사회 변동이나 시대적 상황에 무감각한 의사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의대생이나 의사들이 그 어떤 목표나 의식도 없이 살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사들은 그 대신 자신의 고유 영역 내부의 문제들에 집중 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18) 가령, 의사-환자 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임상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불확실한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 것일까? 내가 이 환자에게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과연 최선일까? 의사들은 이러한 것들을 고민한다.19) 그리고 그러한 고민들에서 숭고한 의미를 발 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민 속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변동이나 시대적 변화에 대한 고찰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적 차원에서, 조금 더‘큰 그림’ 을 그려보고자 하는 시도는 지속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 면허 의사들 7명의 활동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한국근대서 양의학교육사』는 그러한 시도의 한 예시로서 의미를 갖는다.

1) 해리콜린스·트레버핀치, 이정호·김명진옮김『, 닥터골렘』(사이언스북스, 2009).

2) 플라시보 효과는 인체의 생리적 기능에 아무런 효과도 없는 약이나 치료가 실제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3) 최근이와관련된이슈로, 장병두할아버지기소사건이있다. 참고서적『, 맘놓고병좀고치게해주세요』(정신세계사, 2009), 참고사이트, <장병두할아버지생명 의술 살리기 모임> http://cafe.naver.com/lovelifejang/

4) 이 책이 발간된 2008년은 한국 최초의 면허의사가 배출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5) 여인석외⌜, 한국의사면허제도의정착과정⌟『, 의사학』11(2002).

6) 박윤재⌜, 일제초의학관련법제의정비와식민지의학체계의성립⌟『, 한국근대의학의기원』(혜안, 2005), 278~330쪽.

7) 한국근대의학사에대해다룬연구들로는대표적으로,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한울, 1997);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습격하다』(역사비평사), 2004); 박윤 재『, 한국근대의학의기원』(혜안, 2005) 등이있고, 특히근대의학교육에관련된연구들로는기창덕『, 한국근대의학교육사』(아카데미아, 1995); 이충호『, 한국의 사교육사연구』(국학자료원, 1998) 등이있다. 기독교계의의학교육에관한연구로는, 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넷, 2003)이있다. 비슷한주제로, 근대치 의학사에대한연구로, 신재의『, 한국근대치의학사』(참윤퍼블리싱, 2004)를참조할수있겠다,

8) (관립) 의학교에대한주요연구들을소개하면다음과같다, 배규숙,⌜ 大韓帝國期官立醫學校에관한硏究⌟, 이화여자대학교석사학위논문(1991); 기창덕,「 국가 에의한서양의학교육- 1895년부터1945년까지⌟,『 의사학』2권1호, 대한의사학회(1993); 기창덕,⌜ 의학교육의현대화과정⌟,『 의사학』3권1호, 대한의사학회 (1994); 서홍관,⌜ 우리나라근대의학초창기의교과서들⌟,『 의사학』3권1호, 대한의사학회(1994);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한울아카데미(1997); 주진오, ⌜서양의학의수용과제중원-세브란스⌟,『 역사비평계간38호』(1997, 역사문화연구소); 여인석,⌜ 대한제국기의官에의한의학교육⌟,『 연세의사학』2권2호, 연세 대학교의과대학의사학과(1998); 신동원,⌜ 광무개혁과의학교⌟,『 의학교관제반포100주년기념학술대회발표논문집』(1999); 황상익,⌜ 역사속의의학교⌟,『 의 학교관제반포100주년기념학술대회발표논문집』(1999); 황상익⌜, 역사속의학부“의학교”, 1899~1907⌟『, 한국과학사학회지』22권2호, 한국과학사학회(2000); 박윤재『, 한국근대의학의기원』, 혜안(2005).

9) 이 책의 제2부 3장에서는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초창기 의사들인 서재필, 김익남, 안상호, 김점동, 박종환, 오긍선, 박일근에 대해서 살펴본다.

10) 이 시기의 교육은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박형우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당시의 학생들은 기본 체계가 전혀 다른 새로운 학문을 외국어 로 공부해야 한다는 어려움으로 인해 공부에 대한 의욕을 쉽게 상실했을 것이다. 또 생활이 걱정 없이 장기간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으 며, 또한 어느 정도 영어 교육만 받았어도 비교적 용이하게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의학 공부를 끝까지 지속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당 시조선정부나(알렌으로대표되는) 미국북장로회선교부는의학교육에대해서제한적인관심만을가지고있었다. 박형우지음,『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 년의사, 2008), 77~78쪽.

11) 박형우지음『,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청년의사, 2008), 226~229쪽; 여인석외⌜, 한국의사면허제도의정착과정⌟『, 의사학』11(2002).

12)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위생기구가 정비되는 과정이 식민 지배가 공고해져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의료법규는 대한제국에서 통감부, 그리고 다시금 조선총독 부로 그 지배의 주체가 변환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 정비되었고, 이 과정 속에서‘의사’에 대한 자격 또한 공표되었다.

13) 박윤재지음⌜, 일제초의학관련법제의정비와식민지의학체계의성립⌟『, 한국근대의학의기원』(혜안, 2005), 138쪽.

14) 의사란 일본 의사면허를 가진 자, 조선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한 자, 조선총독이 정한 의사시험에 합격한 자로 한정되었다.

15) 여인석외, 한국의사면허제도의정착과정『, 의사학』11(2002), 146쪽.

16) 명칭의 변화 또한 수반되었다. 우선 의술개업인허장은 의사면허로 대치되었다. 또, 이전에 일반적으로 의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던‘의사(醫士)’라는 용어는 이제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의료인에게‘의사(醫師)’라는 명칭으로, 전통의학을 시술하는 의료인에게는‘의생(醫生)’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사용되게 된다.

17) 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는 김교준, 김명식, 김봉관, 김상건, 김성집, 박희달, 방한숙, 손진수, 안우선, 유병필, 윤상만, 이규영, 이병학, 이제규, 채영석, 최진협, 한 경교, 한우근, 허균 등이 있다.

18) 펠레그리노(Pellegrino)는 의학의 존재론을 정립하기 위해 고민한다. 그는 특히 의학에서의 임상적 판단에 주목하는데, 의학을 다른 경험과학들과 구분 짓는 핵 심적 특징으로서 그가 지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의학적 판단에 있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확실성, 엄격성, 논리적 혹은 수학적 타당성이 아니라‘환자에게 좋은가’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환자의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특징들이 함께 고려해야 한다. Edmund D. Pellegrino & David C. Thomasma(1981), pp. 119-152.

19) 제롬그루프먼지음, 이문희옮김『, 닥터스씽킹』(해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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