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의학교육의 기원
Origin of the Modern Medic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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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육의 역사는 장구하다. 의학을 인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학문으로 볼 수 있다면 그 교육 역시 그에 상응하는 역사를 가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술과 주술이 혼합된 형태가 아 니라 분화되고 전문화된 영역으로 의학이 자리 잡은 이후를 기 준으로 하더라도 서양은 이미 기원전 10세기, 혹은 중근동 지방의 고대문명에서는 그보다 더욱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 다. 의학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은 이상 그에 대한 지식을 지닌 사람을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인력양성 시스템은 필 수적이다. 여기서 어떤 방식의 시스템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데 우선 서양고대, 특히 그리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는 초창기에 의술이 가업으로 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의술과 같이 기술직은 이처럼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웃나라 일본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집안을 통한 세습은 그 연속성이 반드시 보장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자식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세습되는 기예에 영 흥미가 없거나 능력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양자를 들이거나 외부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상황은 이미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의학이 집안에서 전수되는 경우는 교육기관을 통한 체계적인 전수라기보다는 현장에서 보고배우는 소위 도제식 교육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단순히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도제식 교육에서 벗어나 의학교육은 보다 체계적인 모습을 띤다. 갈레노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명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이때의 의학교 육은 자기 학파의 이론을 주로 가르치는 것으로 요즘과 같이 보편적 의학이론을 교육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특정 입장의 의학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만약 다른 학파의 이론들도 함께 알고 싶다면 해당 의학파에 가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 로 갈레노스는 그와 같이 여러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의학을 배웠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당대의 의학을 집대성한 체계적인 의학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갈레노스 자신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많은 책을 남겼으나 다른 의학자들처럼 학파를 만들어 제자를 길러내려는 노력을 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중세의 시작과 함께 종말을 맞는다. 중 세기의 의학지식은 주로 수도원을 통해 전승되었고 민간에는 다양한 종류의 의료인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와중에 서양에서는 최초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의과대학이 설립된다. 이후 몽펠리에, 볼로냐, 파리 등 유럽의 각지에 의과대학들이 생겨나며 의학은 신학, 법학과 함께 중세 대학의 기본적 학문의 하나로 여겨 졌다. 그런데 중세 대학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의 특징은 텍스트의 강독이 주를 이루었다. 즉 실험이나 실습이 없이 강의실에서 교수가 갈레노스와 같은 권위 있는 고대 의학자들의 저술을 강독하는 형태로 의학교육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까지도 지속되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는 해부학이 교수되었고, 교수가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이발사를 통한 해부 시연이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스스로 해부를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어쨌든 책 밖으로 나와 실제 사람의 몸을 보여주려 시도한 점에서 그 의의는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육에도 아직 문제는 있었다. 즉 해부를 통해 습득한‘죽은’사람의 구조에 관한 지식이 살아있는 사람이 앓고 있는 질병의 치료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죽은 자와 산 자, 질 병과 관련된 구조와 기능을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는 다른 교육과 연구의 장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병원이었다.
근대 이전 병원은 의학 발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종의 자선 기관이었다. 즉 당시 병원은 의학적 치료가 행해지는 공간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걷어서 먹여주고 재워줌으로써 건강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오 늘날과는 달리 병원은 의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곳이 아니었고, 수사나 수녀와 같은 성직자들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돌보는’장소였다. 다시 말해 당시의 병원은 의학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던 별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병원은 의학의 중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즉 병원이 단순한 자선의 공간에서 의학적 연구와 교육의 핵심적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의학 교육과 관련하여 이제 는 더 이상 강의실이 아니라 병원이 의학교육의 중심적 장이 된 것이다. 이와 함께 특기되어야할 점은 외과와 내과의 통합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외과의사와 내과의사는 사회적 신분이 다른 별개의 직종이었다. 이발사에서 기원한 외과의사는 사회적으 로 내과의사에 비해 낮은 지위였다. 따라서 외과와 내과를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별도로 존재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함께 구체제의 일부로 규정된 의료계(내과의사)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고, 개혁의 내용은 내과와 외과의 구별 철폐라는 형태로 일어 났다. 따라서 의과대학에서도 과거와는 달리 내과만이 아니라 외과도 함께 가르치게 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근대적 의학교육은 강의실과 텍스트에만 국한되었던 의학교육의 장이 병원이라는 임상공간으로 확장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의학교육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의학의 내용 자체도 병원이라는 임상공간을 중심으로 재편되 면서 근대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동안 분리되었던 내과와 외과가 의학이라는 학문으로 통합되어 동등한 자격으로 가르쳐진 것 역시 근대적 의학교육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