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최근 한국 사회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1]. 2024년 기준 체류 외국인은 전체 인구의 5.2%를 차지하여 이주민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 더불어 다문화 가구의 꾸준한 증가[
3]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 및 인식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국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에 다양성과 포함을 확대하고, 모든 구성원에게 교육 및 지원 자원에 대한 공정한 접근성을 제공하며, 구성원 개개인의 다양성 존중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제도와 가치관의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인구 구성과 사회적 가치 변화에 발맞춘 대응이 요구된다. 특히 문화적 민감성, 건강형평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차별 없는 진료태도는 현대 의료인에게 필수적인 자질로 간주된다[
4]. 그러나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여전히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겪고 있다[
5-
7]. 이러한 경험은 종종 의료진의 무의식적인 편견, 부적절한 언어 사용, 또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환자-의료진 간 신뢰가 무너지고, 건강형평성이 저해되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건강불평등이 심화될 우려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의료인의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함(inclusion), 즉 DEI 역량을 체계적으로 함양하는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미국 의과대학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AAMC)는 모든 환자에게 공정하고 포용적인 진료를 제공하기 위한 필수 역량으로 DEI를 제시하며, 이를 임상능력 교육, 차별 예방, 건강불평등 해소, 조직 내 소속감과 존중 문화 형성 등과 연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4]. 이러한 국제적 흐름은 의학교육과정에서 DEI를 단순한 선택과목이나 부가적 활동이 아닌, 핵심 교육목표와 필수 학습성과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국내 의학교육은 생의학적 지식 전달과 임상 술기 훈련에 집중되어 있다[
5]. 이에 비해 DEI의 가치에 대한 학습이나 임상현장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경험은 부족하며, 관련 교육이 정규과정 속에서 구조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한국 의료의 국제화와 환자군의 다양성 확대는 의료인의 문화적·임상적 감수성과 윤리적 역량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8]. 이러한 역량은 환자-의사 및 의료진-사회 간의 신뢰 형성, 안전한 진료환경 유지, 공정한 의료자원 분배, 그리고 소수자 인권 옹호 등 다양한 차원에서 필수적이다.
DEI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 의과대학이 어떠한 정책과 비전을 가지고 미래 의사를 양성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가치가 얼마나 투명하게 대외적으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과대학의 공식 웹사이트는 사명과 핵심 가치, 교육목표, 지원정책을 외부에 공개하는 주요 창구로, 해당 기관이 DEI를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원이 될 수 있다. 또한 의학교육평가인증 기준은 의과대학이 사명과 의도한 교육성과를 명확히 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9]. 이러한 맥락에서 공식 웹사이트에 제시된 사명, 교육목표, 학생지원 관련 기술을 분석하는 것은 각 의과대학이 DEI 관련 가치를 어떻게 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검토하기 위한 타당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해외 선행연구에서는 의과대학 및 수련기관의 공식 웹사이트에 공개된 DEI 관련 정보가 기관의 실천 의지와 투명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10].
이에 본 연구에서는 국내 40개 의과대학의 공식 웹사이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국내 의과대학에서 DEI가 어떻게 명시되고 있는지 그 전반적 수준을 살펴보고자 한다. 양적 분석으로 의과대학의 특성별로 DEI의 명시를 비교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질적 분석을 바탕으로 DEI가 어떠한 실천 방향이나 의미 체계로 드러나는지, 각 대학이 DEI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지 고찰하였다.
고찰
본 연구는 DEI를 분석의 주제로 삼아, 의과대학의 사명 및 가치, 교육목표, 졸업역량, 학생지원이라는 네 가지 의학교육 영역에서 DEI 관련 표현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각 영역에서 관찰된 문구를 통합 분석하여, 국내 의과대학들이 DEI를 어떤 수준의 이행전략(선언, 교육규범, 제도 또는 실천)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지를 해석하였다. 국내 40개 의과대학 웹사이트를 분석한 결과, 전반적인 DEI 유의어와 관련 문구가 한 번이라도 명시된 학교는 32개로, 80%에 해당하였다. 장학금, 생활지원 및 취약계층 지원, 심리상담 서비스 등 학생지원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DEI와 연관된 내용이 더 자주 발견되었다.
형평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명시된 본 연구의 결과는 기존의 다른 선행연구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형평성의 측정이 기관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지만, 프로그램 운영이나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다는 연구가 있었으며[
19], 형평성 실천이 어렵게 되는 배경에는 형평성을 증진하고 포용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및 역사적 장애물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20].
선행연구에 따르면, 고등교육기관의 미션 및 가치는 캠퍼스의 핵심 가치와 학생 학습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제도적 우선순위를 표현한다고 한다[
21]. 연구결과, 미션과 가치에서 DEI의 명시가 적었다는 것은 공식문서에서 DEI가 대학의 존재 이유나 교육철학의 중심 가치로 전면에 내세워지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다.
양적 분석에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학의 DEI 명시비율이 각각 84%와 78%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과 실제 DEI 실천 수준 간의 관련성은, 웹사이트 업데이트 빈도, 홍보전략, 행정 인력규모, 용어 사용 선호 등의 요인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질적 연구에서 DEI를 구분하여 살펴보았을 때, 다양성은 다문화 이해, 차별금지, 글로벌 인재 양성 등 비교적 선언적인 수준에서 가장 넓게 명시되는 경향을 보인 반면, 형평성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 지원, 장학제도, 장애, 북한이탈주민 지원 등 일부 정책 영역에 국한되어 관찰되었다. 포함은 주로 환자 포용적 진료, 차별 없는 학습환경, 캠퍼스 내 소속감 증진 등의 표현을 통해 나타났다.
본 연구에서 추가적으로 세부 주제를 통합 분석했을 때 선언과 가치, 전문가 규범, 실천과 제도라는 세 가지 범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DEI 관련 가치와 규범은 대체로 장학금, 생활상담, 취약계층 지원 등 학생지원 영역에 더 무게를 두어 구현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교육목표나 졸업역량 등 교육과정 전반에서 DEI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통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명시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교육적 적용방식은 불분명하였다. 2022년에 발표된 Beach와 Segars [
22]의 논문에서는 DEI 개선을 위해 대표성, 참여, 적용, 책무성의 네 가지 핵심 가치를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대표성은 조직 구성과 학습자 집단의 구성을 통해 다양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선언과 가치’ 범주와, 참여는 구성원의 참여와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목소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문가 규범’ 범주와, 적용은 제도와 정책을 통해 DEI를 실제 실행에 옮긴다는 점에서 ‘실천과 제도’ 범주와 각각 유사한 맥락을 보인다. 이 외에도 2023년 캐나다대학협(의)회 보고서에서 DEI는 선언보다도 정책과 실행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제임을 명시했다[
23].
국내 의과대학이 DEI를 주로 장학금, 생활지원, 상담 등 학생지원제도에서 비교적 적극적으로 드러낸 반면, 미션과 가치, 교육목표, 졸업역량 등 교육철학과 학습성과 수준에서는 사회적 책임, 공공성, 취약계층 배려와 같은 전통적 가치 안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경향이 드러났다. 이는 교육에 대한 한국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해 현재 웹사이트에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정체성 기반 다양성(인종, 성 정체성 등)이 체계적인 교육목표로 구체화되고 있는 수준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점 또한 한국의 사회적 맥락이 반영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경쟁적 입시, 임상 중심의 교육문화, 표준화된 평가체계 등은 한국 사회에서 DEI를 교육과정의 핵심이 아닌 부가적인 선택주제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의과대학에서 DEI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학생지원 차원의 복지와 장학정책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인구, 가족 구조 변화와 건강불평등 문제를 반영한 교육목표 및 졸업역량 재정비가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AAMC와 WFME 등에서 DEI를 단순 선언에 그치지 않고 학습성과의 구성요소로 포함시키려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4].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DEI가 교육과정에서 구체적인 학습성과나 임상수행능력 수준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명확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다양성을 지향한다’거나 ‘취약계층을 지원한다’는 정책 문구가 제시되어 있으나, 이러한 가치가 교육과정에서 구체적인 학습성과나 임상수행능력의 수준으로까지 체계적으로 연결 또는 구체화되어 있는지는 본 연구의 자료만으로는 명확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본 연구는 국내 40개 의과대학의 공식 웹사이트를 대상으로 DEI 관련 내용을 체계적으로 수집 및 코딩하고, 양적 빈도분석과 질적 코드분석을 결합하여 DEI 가시성의 수준과 의미를 다층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각 의과대학 공식 웹사이트에서 추출한 개별 문구, 정책 설명, 학생지원제도 관련 서술을 코드 단위로 세분화함으로써, 단순 명시 여부를 넘어 DEI가 어떤 맥락(미션과 가치, 교육목표, 졸업역량, 학생지원 등)에서 어떤 뉘앙스로 등장하는지, 그리고 DEI 각각의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본 연구에 몇 가지 한계도 존재한다.
첫째, 웹사이트 분석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공개된 가시성’을 다루는 것으로, 실제 교육과정, 교실문화, 임상현장에서의 DEI 실천 수준 자체를 직접 측정하지는 않는다. 일부 대학은 DEI 관련 노력을 웹사이트에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거나, 내부 문서로만 관리할 가능성도 있다. 둘째, 본 연구는 특정 시점의 웹사이트를 대상으로 한 스냅샷 분석이므로, 향후 업데이트·명칭 변경·구조 개편 등 시간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 셋째, DEI라는 개념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틀을 따르고 있으나, 국내 의과대학 웹사이트에서는 ‘사회적 책임,’ ‘공공성,’ ‘사회적 약자 배려’ 등 인접 개념이 다양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 이러한 표현을 DEI의 범주 안에서 어떻게 해석할지에 따라 결과가 일부 달라질 수 있다. 코딩과정에서 연구자의 해석과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향후에는 다수의 코더 간 합의와 신뢰도 지표 제시 등을 통해 이러한 해석의 폭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을 고려할 때, 연구결과를 섣불리 일반화하기보다는, 국내 의과대학 DEI 담론과 제도화 수준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연구는 의료교육 내 DEI 구현 양상을 주제분석을 통해 ‘선언과 가치,’ ‘전문가 규범,’ ‘실천과 제도’의 세 가지 범주 축으로 도출하였다. 이는 기존 해외 연구와 구조적으로 일치함을 확인하였으며, 성공적 DEI 실천을 위해서는 이러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향후에는 실제 학생 또는 관련 전문가를 대상으로 DEI 필요성에 대한 인식조사, 프로그램 도입 전후의 변화 비교 등 실증적 연구가 추가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