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최근 세계 의료와 의학교육계에서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iversity·equity·inclusion, DEI)이 핵심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1,
2]. 본 연구는 DEI를 식민성(coloniality), 즉 근대 서구 사회가 형성해온 서구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가부장주의가 오늘날 의료, 교육, 제도 속에서 정상성과 합리적 지식체계로 지속적으로 작동해 온 역사적·구조적 조건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한다[
1,
3,
4]. 이러한 식민성은 유교적 위계·가부장주의·권위주의가 중층적으로 결합한 혼종 양상으로 한국 의료와 의학교육에서 작동해 왔다[
5]. DEI는 1980년대 Cross 등[
6]이 제시한 문화역량(cultural competence) 개념을 비판하며 출현한 문화감각(cultural sensibility), 문화겸손(cultural humility), 비판의식(critical consciousness), 문화안전(cultural safety) 등 다양한 문화 다양성 접근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Table 1), 의료와 의학교육을 권력과 구조의 문제로 재위치시켜 온 이론적 계보 위에 있다[
7-
10].
초기 문화역량 교육은 주로 인종, 종족, 종교 소수자를 대상으로 그 집단의 특성을 일반화하고, 의사가 갖추어야 할 문화 관련 지식, 술기, 태도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6,
7,
9,
11-
13]. 이 교육들은 비서구권 이민자의 문화 특성, 이들을 대할 때 의사가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외국어 사용과 통역사 활용 등에 초점을 두었다[
7,
9,
14].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문화를 인종·종족·종교에 국한하고, 개인 수준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조직과 시스템을 간과하며, 지식 습득 중심으로 운영하여 동일 문화권을 일반화하고 오히려 문화 편향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7,
9,
13,
14]. 또한 의사의 특권과 편향, 의료 관계에 내재한 권력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 받았다[
13].
문화안전은 의료인이 자신의 문화적 위치를 점검하고, 자신의 “편향, 태도, 가정(assumption), 자신이 속한 구조와 제도가 임상 상호작용과 의료서비스 제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15]. 이는 의료인과 기관이 지속적으로 자아성찰과 자아인식을 수행하고, 문화적으로 안전한 진료를 제공할 책임이 자신과 기관에 있으며, 그 안전 여부는 환자와 공동체가 경험을 통해 판단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15]. 문화안전은 의료인의 인식 변화와 성찰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화감각과 문화겸손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또한 의료에 내재한 권력관계를 가시화하고, 의료인이 자신의 위치성과 특권을 성찰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비판의식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문화안전은 더 나아가 의료인과 환자 사이의 권력관계, 조직과 제도의 작동방식, 제도와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문제화한다[
10,
13,
16,
17]. 문화안전 관점에서 환자는 의료관계의 능동적 행위자이며, 자신이 받은 의료서비스가 문화적으로 안전한지 판단하는 주체이다[
10,
13,
16,
17]. 문화안전은 모든 교육환경과 시스템, 구조와 정책에서 문화 편향과 권력 작동을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는 제도적 조치를 요구한다[
10,
13,
16,
17].
문화안전은 1990년대 뉴질랜드 마오리족 간호사들이 처음 제안했다[
10]. 당시 이들은 서구 기반의 간호교육이 마오리족에게 문화적으로 안전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준비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0]. 문화감각, 문화겸손, 비판의식이 주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의료인의 내적 변화와 인식 수준에 초점을 두어 왔다면[
7-
9], 문화안전은 마오리족과 같이 식민지배를 경험한 집단의 경험을 기준으로 구조를 판단하고, 의료와 의학교육의 관계 구조, 제도 권력 자체를 재구성하는 개념으로 확장한다[
10,
13]. 근대 서구 의학이 전 세계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형성·강화된 의료 권력과 지식 질서, 전문직 규범을 문제화하고, 안전과 정당성의 기준을 환자와 공동체의 경험으로 이동시킨다[
10]. 따라서 본 연구는 문화안전이야말로 한국 의료와 의학교육이 식민성에서 벗어나, 한국 맥락에 적합한 DEI를 실천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나라 의학교육에서 문화안전 교육을 보고한 사례는 극히 제한적이고, 저자들의 선행 연구도 일부 수업 사례와 학생 반응을 간략히 소개하고 학생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화 편향을 분석하는 수준에 그쳤다[
5,
18]. 그러나 저자들은 한국 맥락에서 문화안전 교육을 실제로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해 왔는지 충분히 기술하지 못했다. 특히 문화 편향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수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고, 학생 저항과 혼란을 관리했는지에 대한 실천적 지식은 공유하지 못했다. 문화안전 수업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위치, 편향, 권력, 전문직 정체성을 직접 마주하게 하므로, 그만큼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교육인 동시에 쉽게 오해되거나 실패할 수 있는 수업이기도 하다[
19-
22]. 문화안전 교육의 성패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순서로 배치하며, 어떤 장치를 통해 학생들의 방어를 완화하고, 언제 개입하고 언제 멈추는가와 같은 교수자의 구체적 판단 속에서 결정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저자들이 서로 다른 학년, 교과 위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문화안전 수업을 구성·운영해 온 경험을 정리하고, 각 맥락에서 수업내용과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문화안전 교육을 실제로 설계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다. 저자들의 세 수업은 단일 대학의 선형적 교육과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대학·학년·사회적 맥락에서 문화안전 교육을 적용·조정·재구성해 온 과정이다. 본 논문은 이 개발 시간순서에 따라 저자들의 교육 실천경험을 서술하면서 그 결과를 간략히 제시하였다. 아울러 향후 문화안전 교육자를 위한 실행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한다.
인제의대의 의학과 3학년 문화안전 수업
2017년부터 의학과 3학년을 대상으로 문화안전 수업을 시작하였다[
18].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인제의대)는 2025년 현재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의 학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통합 6년제를 목표로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있다. 문화안전 수업은 3학년 1학기 임상실습 전에 시행하는 환자안전 과정 안에서 진행했고 학생 수는 매년 95–100명이었다. 2017년에 파일럿으로 4시간 진행해본 후 2018년부터는 정규수업으로 확정하면서 수업시간도 6시간으로 확대했다.
2018년 이후 수업성과는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첫째, 문화안전이 중요함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 각 개인이 한 문화의 고정관념으로 다 파악할 수 없음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 자신과 조직에 내재한 문화 편향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넷째,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우세한 분위기에서 환자를 진료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다섯째,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환자의 문화에 대한 특정한 가정하에 진료함으로써 환자안전에 해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여섯째, 나와 다른 관점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다.
수업주제는 외국인 진료에 한정하였다. 이는 한국의 젠더, 지역, 사회경제적 지위, 성소수자 문제를 먼저 다룰 경우 학생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특권, 당연하게 여겨온 규범성이 토론의 전면에 놓이면서, 학생들의 방어와 저항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들은 수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임상 장면에서 문화 편향을 먼저 탐색하는 출발점이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외국인 진료경험을 수업의 주요 주제로 설정하였다.
수업은 강의보다 대화(dialogue)를 핵심 교수학습방법으로 설정했다. 즉 교수가 문화안전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례를 제시하고 외국인 환자와 직접 대화하게 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인식과 반응을 스스로 성찰하도록 했다(
Table 2). 한국인이 흔히 가지는 문화 편향을 흔들 수 있도록 다양한 배경의 외국인 패널을 초대했다. 국적으로 영미권, 비영어권 유럽, 중국, 그 밖의 아시아, 이슬람권을 고려했으며, 젠더, 종교, 결혼 여부, 직업, 교육수준, 부모 경험, 병원 경험을 바탕으로 매년 6명 내외로 구성했다. 사용한 교수학습방법은 강의, 토의, 질문형성기법, 성찰, 글쓰기 등이었다(
Figure 1). 먼저 외국인 환자를 소개하였다. 학생들은 조별로 모여 외국인 패널에게 물어볼 질문을 토의하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교수자는 학생들에게 질문과정에서 문화안전을 고려하고 비언어적 행동에 유의하라고 예시를 들어 설명하며 강조했다. 대화가 끝난 후, 학생들은 대화 경험을 조별 토의로 정리하고 성찰지를 작성했다.
수업 전 성찰지에서 학생들은 외국인 진료를 주로 대형병원에서 의사가 통역사와 함께 외국인 환자를 만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환자의 문화에 맞추면서도 치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치료에 대해 잘 설득”하고 “환자의 순응도를 높여 좋은 결과”를 얻으려 했다. 스스로 “문화 편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다수였으며, “외국어 학습, 문화 지식 습득, 외국인에게 흔한 질환 학습이 필요하다”고 성찰했다.
수업 후 학생들은 “외국인 환자가 한국인과 다르지 않으며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다. 외국인 환자가 통역사 없이 개인 의원에도 내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자보다 질병에 초점을 맞추고 의사를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음을 성찰하며, “의사가 인간을 치유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자기가 가진 문화 편향이 예상보다 훨씬 많음”을 알았고, “3분 진료와 같은 한국 의료시스템의 모순이나,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을 생략하는 것과 같은 한국 문화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환자들의 고통을 심화시킨다”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행이 “한국인 환자들에게도 불편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학생들은 “다양한 사람을 직접 만나 경험하는 과정이 자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편향과 시스템 문제 성찰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부 학생은 문화안전 수업에 불만을 드러내거나 혼란을 보였다. 몇몇은 “외국인 환자는 한국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학생은 “한국 의료시스템은 원래 그러하므로 외국인이 이해해야 한다”고 적었다. 일부는 환자의 문화를 어디까지 수용할지 혼란을 드러냈고, “외국인 환자가 동양인 의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내세우는 상황을 의사가 어디까지 감내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학생들은 “외국인 환자도 의사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6시간의 문화안전 수업은 학생들이 외국인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와 전문직 정체성, 더 나아가 한국 의료시스템의 구조적 문제까지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수업은 인종과 국가 문제에서 출발하여 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문화 편향과 제도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했다. 그러나 전체 과정이 환자안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한국의 다양한 집단에 대한 문화 편향, 의료시스템의 문제까지 논의할 시간은 부족했다. 또한 겸손과 존중이 이미 한국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는 맥락에서 의사 존중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다룰 시간은 없었다.
연세원주의대의 의학과 1학년 의료면담 수업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연세원주의대)은 현재까지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의 학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8년부터 의학과 1학년을 대상으로 의료면담 수업을 ‘환자·의사·사회 III’이라는 과정명으로 시작하였다. 의료면담 수업 중에 ‘문화 다양성’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포함시켰다. 2020년까지는 3시간 수업이었지만, 2021년부터는 4시간으로 늘렸다(
Table 3). 수업 후 학생 평가를 위해 자아성찰지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수업은 본 논문에서 제시한 세 사례 중 초기 단계의 실천으로, 문화역량 중심 교육에서 문화안전 관점으로 이동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 이 수업에서는 문화안전의 출발점으로서 의사의 문화 편향이 진료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이는 환자안전과 연결될 수 있음을 비교적 정서적 저항이 적은 소재를 통해 먼저 인식하고 성찰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저자(K.H.P.)는 의료면담 상황에서 작동하는 문화 편향과 의사-환자관계에 내재한 비대칭성을 성찰하는 문화안전 주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수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문화 편향을 성찰하고, 환자를 특정 문화 범주에 환원하지 않고 개별적 경험의 주체로 인식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었다. 수업의 구체적인 학습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역량의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 타인과 나의 다양성을 인지할 수 있다. 셋째, 사회적 가치와 종교적 신념 등에 따라 질병을 대하는 태도가 다양함을 알고, 환자 상황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할 수 있다. 넷째, 환자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의료면담을 할 수 있다. 다섯째, 다문화 의사소통과 사회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을 알고 극복할 수 있다.
수업의 내용은 우리 사회 구성원과 환자들이 인종, 국적, 문화적으로 다양해지고 있음을 통계자료로 제시하고, 저자가 응급의학과 전문의로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문화 편향을 성찰했던 경험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외국인 환자와의 경험에서 시작해서 대상을 난민, 성소수자, 탈북민 등으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환자뿐 아니라 우리나라 의사들도 외국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마지막으로, 문화 다양성 너머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병 경험, 즉 질병에 대한 관점과 관심이 다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강의 이후에는 국내에 오랫동안 거주하였고, 의료 통역이나 병원 이용경험이 풍부한 외국인을 매년 한 명 섭외하여 외국인 관점에서 경험한 우리나라 의료현장에 대한 특강을 수업에 포함하였다. 이들은 한국 거주기간이 길어서 모두 한국어로 특강을 하였다. 그동안 섭외된 강사는 한국어-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인 러시아인, 미국과 캐나다 이중 국적이며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거주했던 본교의 인류학 교수, 본교 병원 국제진료센터 직원인 러시아인 등이었다. 강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편향, 한국만의 의료문화, 외국인이 한국 의사나 진료과정에 관심 있거나 원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였다. 학생들은 특강 강사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기 전에 브레인스토밍으로 다음 네 개 질문에 대해 답변을 적도록 하였다.
• 환자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 병원에서 다문화 환자가 겪는 어려움과 장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다문화 환자를 진료할 때 의사가 겪는 어려움과 장애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앞으로 다문화 환자를 대해야 하는 의사로서, 지금부터 어떤 것들을 준비하겠습니까?
수업 후에는 수업 전에 작성했던 네 개 질문에 대한 답변과 추가로 ‘자신이 깨달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편향’에 대해 성찰지를 작성하였다. 학생들이 깨달은 문화 편향에 대해서는 3개년 내용을 분석하여 2025년에 발표하였다[
5]. 발표된 논문에서 분석된 내용 이외에도 저자가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편향이 있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학생이나, 외국 국적의 학생들은 한국 문화에 대한 편향을 성찰하였다. 서울에서 자란 학생들은 지방에 대한 편향, 지방에서 자란 학생들은 서울에 대한 편향을 성찰하였다. 그 외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 한의학, 비만, 중장년층, 다른 성별의 의사 등에 대한 편향도 성찰하였다. 또한 “외국인 환자를 진료할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거나, 스스로 “편향이 없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Jowsey [
17]는 문화역량의 깊이를 바다의 깊이에 비유하여 ‘표면역량 영역(surface competency zone),’ ‘편향의 황혼 지대(bias twilight zone),’ ‘직면해야 하는 한밤중의 영역(confronting midnight zone)’으로 표현하였다. ‘표면역량 영역’은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문화 특화 지식 적용에 초점을 두며, ‘편향의 황혼 지대’는 개인의 내재된 편향과 무의식적 태도를 인식하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자기인식을 심화시키는 단계이다. '직면해야 하는 한밤중의 영역'은 개인의 사회적 위치, 권력, 특권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구조적 불평등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적 단계로, 문화안전의 핵심 영역에 해당한다. 이 분류를 기반으로 하였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 후 자신의 무의식적 ‘편향의 황혼 지대’에 도달하지만, 일부는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저자가 수업한 내용과 관련된 고정관념만 재확인하고 영어 공부의 필요성만 언급하는 등의 ‘표면역량 영역’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은 진료실에서 다른 문화권 환자를 진료할 때 “의사인 자신이 편향의 대상이 되어 의사로서 자신의 위치가 취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즉 4시간의 수업으로 인제의대 의학과 3학년 사례와 마찬가지로 태도와 인식 수준의 성과를 달성하였고, 의료면담에서 의사로서 어떤 태도와 위치, 책임, 역할을 가져야 할지 성찰하는 데는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권력관계와 구조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경우가 적었다. 또한 수업 중 드러난 여러 문화 편향을 충분히 다룰 시간도 부족했다. 향후 문화안전을 위해 환자 진료에서 권력관계와 구조를 비롯하여, 자신의 모든 편향을 충분히 성찰해봐야 한다는 점에서 이 수업을 의료면담 이외의 분야로 확대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인제의대의 의예과 1학년 의료와 문화 수업
인제의대는 2025년부터 의예과 1학년을 대상으로 문화안전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은 의예과 1학년 1학기에 편성된 ‘의료와 문화’ 과정의 일부로 진행했다. 정규 학생 수는 100명이지만, 의정갈등 상황이었기에 참여한 학생 수는 당시 복귀한 학생인 9명이었다. 2025년 7월 이후 학생이 복귀하였으므로, 앞으로의 수업은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수업주제는 외국인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사회 전반의 문화 편향으로 확장했다. 이는 현재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이 이미 ‘다문화’나 ‘외국인 환자’ 담론을 넘어선 조건에 놓여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전 수업에서 사전에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한국 특유의 문화 편향에 대해 뚜렷한 갈등이나 정서적 충돌이 관찰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러한 확장의 근거가 되었다. 더불어 충분한 수업시간을 확보하면서, 그동안 시간적 제약으로 다루기 어려웠던 학습성과인 한국 사회와 의료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 규범성, 편향의 구조의 문제까지 확장하여 탐구할 수 있었다. 아울러 2024년 의정갈등에서 드러난 복귀자와 미복귀자 간 갈등 역시 새로운 편향의 맥락으로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번 수업도 강의보다 토의와 성찰에 중점을 두었다. 의정갈등 때문에 학교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외국인 환자를 참여시키지는 못했다. 다룰 문화 편향은 학생과 교수가 함께 논의하여 정했다. 학생들은 의사집단 내 다수와 소수 간 갈등이나 소수자 배척에 대한 대처를 가장 논의해보고 싶어했다. 또한 한국에 흔한 문화안전 문제와 해결방안, 자신의 문화 편향 성찰방법을 습득하기 원했다. 논의할 문화로는 수혈 거부 등 종교적 문제를 포함하여 수용하기 어려운 환자 문화에 대한 대처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 외 ‘규칙 강요,’ ‘비과학적 의료 선호,’ ‘특정 정치색·성별에 치우친 문화,’ ‘문화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행위’ 등에 관심을 보였다. 교수자는 지역, 사회경제적 지위, 학력, 나이, 세대 등 한국과 세계의 주요 문화 편향을 추가했다.
의료와 문화 15주 수업 중 7주를 문화안전에 할애했다. 매주 2시간씩 총 14시간을 진행했다. 의예과 1학년이 대상이므로 전문직 정체성 형성을 고려하면서 진도를 천천히 나갔다. 학생들이 의과대학 입학 초기부터 사회과학 개념에 익숙해져서 사회를 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과학 이론을 함께 다루었다. 포스트식민주의와 낙인 이론을 주요 이론으로 다루었고, 사례에 맞춰 권위주의, 세대 이론도 소개했다.
수업은 사전 평가와 성찰로 시작했다. 매주 사례를 소개하며 이론과 개념을 설명했으며, 토의를 통해 상황을 해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Table 4). 1주 차에는 외국인 주민 현황과 의료 이슈를 다루었다. 2, 3주 차에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인 오리엔탈리즘과 문화 혼종성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종교, 인종, 영어, 미국과 같은 세계적 이슈와 비과학적 의료, 전통의학, 지방과 같은 한국 이슈를 분석했다. 4주차에는 한국 의학교육과 의과대학생 학습문화에 내재한 포스트식민주의를 탐색했다. 5주차에는 최근의 계엄사례를 통해 권위주의 문화를 짚었다. 정부의 권위주의뿐 아니라, 의료계와 환자의사관계, 의정갈등에서 나타난 젊은 세대 내 권위주의도 함께 검토했다. 소통, 협력, 리더십, 파트너십에 대해서도 성찰했다. 6주차에는 문화 편향과 낙인 개념을 다루면서 팬데믹, 젠더, 나이, 학력, 사회경제적 지위,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질병·장애와 관련한 편향을 성찰했다. 7주차에는 사회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세대 특성과 의정갈등 속 문화 편향과 문화안전을 다루었다. 이후 학생들은 사후 성찰지를 작성했고, 기말에 논술형 시험으로 평가받았다.
과정 전 학생들은 외국인 환자에 대한 편향을 일부 인식했지만 동료나 교수에 대한 편향, 의료와 학습에 내재한 식민주의와 내부 권위주의는 인지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계엄과 의정갈등을 겪으며 권위주의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환자를 대할 때는 권위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계엄과 의정갈등을 겪으며 권위주의의 문제점을 몸으로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혈 거부의 경우 예외 상태이므로, 의사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또 학생들은 자신들이 당한 감시와 낙인에 민감했지만 다른 세대, 성소수자, 지방 거주자, 장애인에 대한 낙인에는 둔감했다.
과정 후 학생들은 외국인에 대한 편향뿐 아니라 지역, 나이, 동료, 교수, 한국인에 대한 편향, 의료와 학습에 내재한 식민주의와 내부 권위주의를 발견했다. 학생들은 환자의사관계가 더 이상 의사의 권위주의로 지탱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자신들 또한 “미복귀학생에 대한 편향을 가졌고 그들을 비난했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은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소수자가 세계와 한국 문화 속에서 편향과 낙인을 경험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학생들은 아직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기에 “경로당이나 장애인 시설, 낙후 지역에서 봉사하거나,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문화 편향을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또 “독서와 글쓰기, 스터디 모임을 통해 논리적 사고에 기반한 목소리를 내겠다”고 하였다. 이 답변들은 이전의 수업처럼 외국인 환자와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기에 나온 결론이라고도 생각된다. 이 학생들은 편향과 낙인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하였지만, 제도적 모순까지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의과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지역사회 및 환자와 함께 할 수 있는 과정, 사회과학적 사고력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프로그램이 잘 연계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수업에서 타 문화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해 대화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함도 시사한다.
결론
이 논문은 한국의 두 의과대학의 문화안전 수업을 소개하고 저자들의 경험과 각 수업의 효과와 한계를 공유하였다. 비록 한 대학의 수직적 교육과정을 전제로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세 경험은 결과적으로 문화안전 교육이 고학년 임상 맥락, 저학년 의사소통 교육, 의예과 초기 전문직 형성 단계에서 각각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향후 수직적 교육과정으로 재구성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화안전 교육은 한국 맥락을 고려한 내용으로 구성하고, 문화적으로 안전한 수업 분위기에서 학생 스스로 자신의 문화 편향을 드러내고 성찰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저자들은 다음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맥락에서 흔한 주요 문화 편향을 중심으로 교육해야 한다. 의과대학생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 맥락에서 세대, 종교, 지역, 비만 등 다양한 문화 편향을 가지고 있다[
5]. 문화역량 교육이 먼저 시작된 서양에서 이슈가 되는 인종, 종족,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만 집중하지 않기를 권한다[
12,
23,
24]. 또한 환자뿐 아니라 동료, 교수, 나와 다른 세대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화 편향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 충분한 수업시간과 다양한 교수학습 전략이 필요하다[
18,
23]. 정서적·태도적 변화를 유도하고 학생들에게 자신의 문화적 위치와 권력 불균형, 제도적 모순을 성찰하고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10,
23-
25]. 인제의대 의학과 3학년 수업과 연세원주의대의 의학과 1학년 수업은 일회성 수업으로 더 깊은 성찰의 기회가 부족했을 수 있다. 의예과 수업에서는 의정갈등 상황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의 사람과 직접 만나지 못하면서 학생들의 성찰에 제한이 있었다.
셋째, 문화적으로 안전한 수업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교수자와 의과대학은 문화적으로 안전한데, 의과대학생이나 의사는 문화 편향을 가지고 있으니 성찰해야 한다는 인식은 문화적으로 안전하지 않다[
10,
12]. 교수자는 수업 운영진과 조직의 문화 편향을 먼저 성찰하고 개선해야 한다[
10]. 학생들이 자신의 편향을 성찰하고 드러내야 하므로 자신의 편향에 대해 공격받지 않는 안전한 수업이라고 느껴야 한다[
10]. 외국인 등 다른 문화권의 패널이나 강사를 초대할 때도 이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12,
18,
21]. 한편, 교수자는 환자도 편향을 드러낼 수 있으며 제도적 모순에 따라 진료가 편향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다루고, 의사만 편향이 있다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12,
24,
26].
넷째, 외국인 등 다른 문화권의 패널이나 강사를 초대할 때, 수업주제에 적합한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초대해야 한다[
10,
18,
21]. 수업의 맥락을 이해하고 한국의 의료시스템이나 의료진에 대해 부정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건설적인 피드백을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
다섯째, 저자들의 수업에서는 성찰지가 주된 평가방법이었다. 문화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설문도구가 있지만, 이는 Jowsey [
17]가 설명한 ‘표면역량’만 알아볼 수 있으며 학생들의 수준이 그 이상의 영역에 도달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6]. 여러 사례에서 평가의 상당수가 일회성 자기보고(self-reporting)에 머물렀으며 객관적 평가나 장기적인 평가는 거의 없었다[
23,
27,
28]. 따라서 교수자는 성찰을 장기적으로 여러 프로그램과 연계하는 평가와 함께, 학생들의 문화 편향을 객관적으로 피드백해줄 수 있는 형성평가를 설계해야 한다[
23].
이 논문의 제한점은 두 의과대학에 국한하여 세 가지 수업을 소개하였고, 저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안전 수업에 대해 제안한 점이다. 다양한 설립 이념과 교육목표를 가진 다른 의과대학에서도 문화안전 수업을 개설하고 학생과 과정 평가의 결과를 도출한다면 한국 맥락에 적합한 문화안전 교육 가이드라인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