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것을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서사에 의해서 정의된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의 이유는 나의 삶의 서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이 아프고 고통할 때이다. 위중한 질병 앞에서 내가 누구이고, 왜 존재해야 하는가와 같은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고 또 확인하게 된다. Sulmasy [
1]는 의료는 단순히 기술적인 처치를 넘어, 환자의 고통, 치유, 그리고 죽음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경험을 다루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묻는 영적인 실천(spiritual practice)의 성격을 지닌다고 쓴다. 84세 할머니에게 심박동기(pacemaker, 심박조율기가 표준의학용어이지만 일반적으로 심박동기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단순히 서맥을 교정하는 의료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만큼 살았다’고 여기는 삶과 ‘아직도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삶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었다. 완전방실차단으로 진단되어 심박동기 시술을 위해 입원했던 할머니는 내게 의료가 다루는 것이 질병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한 사람의 삶의 의미’임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내과 전문의가 된 후 2년간 심장내과 전임의 수련을 받았고, 그 후에 부정맥 분야를 세부 전공으로 택하여 수련하였다. 그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강사실에 있는데, 심장내과 수석 전공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 내일 심박동기 시술을 위해 입원하신 84세 할머니가 시술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환자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 다음날 시술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심장내과 수석 전공의 정도 되었으면, 환자 동의서 정도는 능히 받아야지, 그걸 못해서 나를 찾는다는 것인가?’ 슬며시 짜증이 났다. 전공의는 미안해 하면서 자신이 “1시간 넘게 설명했는데, 환자가 요지부동”이라고 답했다. 평소에 성실하게 일하던 전공의였으니 그 노력은 진심이었을 것이고, 내가 보고를 받았으니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환자 동의서 받는 일이야 간단하지’ 속으로 생각하며 병실에 올라갔다.
병실에는 할머니가 정정하게 앉아 계셨다. 인사를 하고, 간단히 내 소개를 하면서 할머니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을 짚는 행위는 접촉이 일어나는 행위이다. 의료행위이기도 하지만, 손을 내미는 의료인과 손을 내주는 환자 사이에 치료적 관계를 확인하고 구축하는 상징적인 의식(ritual)의 하나이기도 하다. 1분에 30 번 정도 뛰는 심한 서맥(徐脈)이었다. “할머니, 맥이 느리네요”라고 운을 떼었다. “글쎄 잘 지냈는데 요즘 어째 정신을 잠깐씩 놓아. 하긴 이제 그럴 나이도 됐지”라고 답하셨다. 간명한 대답이다. 그 대답은 할머니가 정정하시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었다.
할머니의 심전도를 보니 완전방실차단(complete atrio-ventricular block)이었다. 심장의 맥박을 결정하는 심방율동이 중계소인 방실결절을 통해 심실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 전달과정에서 차단이 일어난 것이다. 방실결절 이하의 심장전기전도계는 자율성이 낮고, 따라서 맥이 느려진다. 그 결과로 수 초 이상 심장박동이 멎을 수도 있고, 역설적으로 맥박이 느려진 것으로 인해 심실빈맥이 발생하는 서맥-빈맥 증후군(Brady-tachycardia syndrome)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심실 박동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대뇌로 혈액이 공급되지 못하고, 그러면 정전되듯 깜박 정신을 잃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병력을 살폈을 때, 방실결절의 전기전도를 억제하는 약물을 드신 적도 없었다. 외래에서 진행한 다른 검사에도 이상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방실결절과 그 이하의 생리적인 전기선의 손상을 의미한다. 손상된 기능을 대신하기 위해 어깨 밑 혈관을 통해 가는 전선을 심방과 심실에 넣고 심박동기에 연결하는 시술이 필요하다. 확실한 적응증이 되는 환자였다.
시술과정에 대해서 할머니께 설명했다. 할머니께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을 선택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국소 마취만 하는 간단한 시술입니다. 명태전 또는 우리 쓰는 수저의 머리만한 작은 심박동기를 피부 아래에 넣기 때문에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당시 나는 할머니께 수술의 필요성을 최고의 기량으로 설명했다고 여겼다. 부정맥 분과 강사이고, 내일 시술에 직접 참여할 내가 직접 설명한 것이 아닌가? 나는 자신 있었다. 심박동기 시술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문제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안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됐다”는 말씀이었다. 가족들도 설득했지만 할머니는 완고하셨고,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심박동기 시술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무서워서 그러시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도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회진 중에 이 상황을 내가 직접 스승께 보고했다. 전공의가 보고하면, 환자를 위한 치료팀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스승께서 나를 향해 “자네는 뭐했는가”고 물으실 것이기에, 지난 밤 나와 전공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도 “제가 직접, 1시간을 넘게 설명했는데도 할머니가 안 하시겠답니다”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신 교수님은 “그래? 내가 한번 만나보지”라고 하신 후 병실에 혼자 들어가셨다. 그리고 바로 다시 나오셨다. “시술 하시겠다네! 빨리 준비하지!”라고 말씀하셨다. 오래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다.
‘전공의와 내가 그렇게 오래 설명을 했을 때는 안 하시겠다더니, 교수님께서 뭐라 하셨기에 이렇게 대번에 시술을 받으시겠다는 말인가? 권위 있는 교수와 젊은 강사의 어쩔 수 없는 영향력의 차이 때문인가? 지위에 따른 영향력의 크기가 이렇게 다른 것인가? 도대체 이 할머니는 무슨 생각이신가?’ 이런 상념들이 스쳤다. 그래서 스승께 탄식과 함께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수술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스승께서는 그저 무심하게 답하셨다.
“한 마디 했지. 할머니, 치료받지 않으시면 자식들이 고생합니다”
그러나 그 무심한 듯한 답을 들었을 때 나는 망치로 쿵하고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의 말씀에 할머니께서 시술받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할머니는 정정하게 몇 해를 더 사셨다.
이 일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내게는 방실차단의 병태생리와 그로 인한 임상 양상, 그리고 최신의 치료법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치료를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역량은 치료가 필요한 할머니가 치료받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스승은 한마디로 할머니가 치료를 받도록 하셨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스승께는 할머니가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자녀들과 연결하는 이해가 있었다. “치료받지 않으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한마디는 할머니로 하여금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게 했고, 할머니는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즉시 수술 받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랬다. 내게는 심전도를 해독하는 실력, 그리고 심박동기를 시술할수 있는 역량이 있었을지 몰라도, 할머니 삶의 의미를 자녀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하고 확인할 수 있는 헤아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심장병에 대한 술기와 역량, 그리고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상황을 해결로 이끌어가지 못했고, 스승께 있었던 지혜는 할머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었는지 당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후 의학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때 스승께서 보인 헤아림이 전문가가 갖추어야 하는 실천적인 지혜(practical wisdom)인 ‘프로네시스(phronesis)’임을 알게 되었다. Kumagai [
2]는 프로네시스가 의사에게 꼭 필요한 실천적 지혜로서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에서 분리될 수 있는 특정의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과 맥락들 속에서 수행되는 것들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프로네시스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어떤 전문적인 특질들을 암기하거나 특정의 교육역량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맥락들과 상황들, 예를 들어 임종 혹은 의료사고의 후속상황 등에 참여한 후(참여된 후), 그에 대한 성찰 과정을 통해서 영글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프로네시스는 생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과 임상적인 술기들을 의료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들 속에서 드러나는 요구들과 도덕적 지남(moral orientation)으로 이어준다.
할머니가 심박동기 시술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게는 ‘완전방실차단’이었으나, 할머니에게는 ‘자식들 고생 안 하기’였다.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서 수술받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지만 내가 사는 동안 나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하면 아니되겠기에 기꺼이 수술을 받겠다는 결정은 놓치기 쉬운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인다. 살수록 삶은 신비로 가득하다. 생각지 못했던 곳과 예상치 않았던 때에 우리는 사랑과 배려의 강줄기와 만난다. 평생토록 자신의 삶을 내어주었던 한 늙은 노모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황조차도 자식을 돌보는 생각에서 결정했다.
심장의 방실 차단을 가족 간의 유대와 연결한 내 스승의 프로네시스와 나 때문이 아니라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수술을 받은 할머니의 결정은 그날 이후 내게 큰 배움이 되었다. 하여 나는 우리 학생들이 환자를 만날 때 심전도를 읽고, 그 심전도를 보인 환자들의 가슴, 삶의 문법을 읽으려 노력하기를 당부한다. 질병의 병태생리를 설명하기 전에, 그 질병이 환자의 삶의 서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고,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3]. 우리가 치료하는 것은 ‘완전방실차단’이 아니라 ‘완전방실차단을 가진 한 사람의 삶’이다. 의학 지식과 술기는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관계를 이해하며, 그 속에서 치유의 의미를 찾아내는 프로네시스를 앞으로 나를 치료해 줄 우리 학생들이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