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대한민국 의학교육의 역사에 잊히지 않는 해가 될 것이다. 작금의 상황을 어찌 이름 짓든 간에 전공의의 거의 전부가 사직하고, 의과대학생 대부분이 학습을 중단한 현실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10년 후 만 명의 의사를 더 충원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시행한 의과대학 정원의 증원 결정은 의료현장에 있던 만여 명의 전공의를 밀어냈고, 신규 의사와 신규 전문의의 배출을 현저하게 감소시키고 말았다. 매년 3천 명 이상 응시하던 의사국가고시에 2025년도에는 364명만이 응시하였고, 그중 267명만이 실기시험에 합격하였다. 필기에 전부 합격한다고 해도 내년에는 267명의 의사만 배출되는 것이다. 전공의의 경우 매년 약 3천여 명 정도의 전문의가 배출되었으나 전문의 자격시험에 응시 가능한 금년의 인원은 576명이며, 그나마 실제 출근 중인 전공의는 396명에 불과하다[
1]. 전문가를 배제한 강력한 정부 주도의 정책 결정, 특히 의과대학 입학정원정책이 가져온 현실이다.
의사 수의 결정은 국가 정책이고, 그 정책 실현을 위해 의과대학 정원의 대폭 증원이라는 정책의 결정은 의학교육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정의 내용과 절차에 동의할 수 없는 의료계의 주요 이해당사자(stakeholders)인 의사, 의과대학 교수, 학생, 전공의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초래된 이 상황은 의학교육이 가지는 사회적인 영향력, 그리고 의학교육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사회적 책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번 호의 특집은 의학교육의 사회적 책무성과 의과대학 입학정책이다. 의과대학이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는 광범위하지만, 특히 의과대학 입학정책을 통해서 의학교육과 의료의 사회적 책무성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주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학입시는 예민한 문제이고 작금의 현실을 통해서 경험했듯이 정부 주도로 결정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의사라는 전문직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므로, 의과대학 입학을 선호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경향이다. 이처럼 대학 진학을 기본으로 하여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졸업 후의 사회적인 신분과 안정된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인지되는 상황에서 대학입시제도, 특히 의과대학 입시제도에 대해 대중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입시가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따라서 입시 부정이나 입시제도가 가져오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 정부가 기민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다.
한편, 우리나라는 국가개발이라는 목적을 위해 고등교육제도의 운영을 국가가 주도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세계은행이 교육과 보건에 대한 지표를 근거로 제안한 인간자본지표(Human Capital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싱가폴, 홍콩, 일본에 이어 세계 4위로 평가되는 탁월한 성취를 보였다[
2]. 이처럼 정부 주도의 고등교육정책 결정과 제도 운영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대학의 발전을 견인했다고 할 수 있으나 학문의 자유와 자율성이 담보될 때 비로소 가능한 창조적이고 탁월한 학문적 깊이를 이루는 것에는 장애가 되고 있다. 2024년 의과대학 정원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는 현재 한국 대학의 학문적 자율성과 대학의 독립성이 어느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증거에 기반하여 분석하고, 치열하고 충분한 숙고를 통해서 결정되고 혹은 개편되어야 하는 것이 교육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과정의 변화와 의과대학 5년제와 같은 학제의 근간이 되는 결정이 의과대학 및 의학교육자들과의 논의도 없이 정부가 불쑥 발표하는 현실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휴일인 일요일 오후에 교육부장관이 교육체제를 바꾸는 심각한 의제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불쑥 발표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 어쩌면 그간 가려져 있었기에 우리 대학의 학문적 자율성의 수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가 이번의 일들을 통해 확실히 그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의학교육의 수준을 유지 또는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의료계의 책임인 동시에 정부의 책임인데, 정부의 정책 실패는 수준을 낮추고, 기준을 흔들어 해결하려는 결정에도 거침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대학입시정책의 역사를 정리해 저술한 배상훈 교수는 대학입시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4].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피상적 이해나 맹목적인 이념에 휘둘려 대입제도를 급하게 바꾸면, 실질적인 공정성의 확보나 교육의 기회 균등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학생과 학교의 부담만 커지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언급은 2024년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각 대학이 대학의 고유한 사명과 교육철학에 따라 자율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대학의 자율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지만, 정성수 교수는 같은 아시아 권역에서 의료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일본과 싱가포르가 의학교육정책을 어떻게 결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관점으로 의학교육정책을 비교해주었다[
5]. 저자가 인용한 정의대로 거버넌스는 “경제, 사회, 정치적 사안의 관리에서 권한이 행사되는 방식을 의미하며 전통적인 정부 기관을 넘어 기업과 비정부 기구를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공동의 이익과 도전에 대응하는 과정”이다[
5]. 정책의 도입과 실행에서 정부, 전문가 단체, 시민의 핵심 주체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역할 하는지에 따라 거버넌스는 정부 주도 또는 민간 주도로 나누고, 권한이 집중 또는 분산되었는지로 나눌 수 있다. 일본의 의사 양성과 입학 관련 정책은 2000년대 초기에는 정부에 권한이 집중된 정책결정이 이루어졌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협력적 거버넌스로 이행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민간 주도적 거버넌스를 가지고 있어 대학이 자율적인 정책결정을 가지는 모델이며, 정부는 주도자가 아니라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싱가포르의 정책모델은 세계보건기구가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계 전문가들의 참여가 배제된 강력한 정부 주도의 거버넌스가 가져온 오늘 우리의 난맥상을 풀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하고, 정부도 전문가들의 역할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허정식 등은 우리나라 대학입학정책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의과대학 입학정책 역시 기본적으로 대학입학정책을 따르고 있음을 개략해 주었다[
6]. 우리나라 의과대학 입학의 핵심 평가요소가 대학입학시험 성적인데, 이는 의과대학 선호도가 높은 상황에서 공정성 시비를 최소화하는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 위주의 선발은 역으로 의과대학 입시 준비를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되거나 정보접근성이 좋은 학생들에게 유리한 선발방식이 되어 차별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불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의료 인력의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사회경제적으로 다른 배경과 자질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역인재전형과 특별전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2024년 의과대학 정원 증원에 따라 수도권을 제외한 권역들에 속한 의과대학들이 지역인재 전형비율을 크게 올렸는데, 이는 정부의 지역의료 활성화라는 목적에 부합하고자 하는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책 때문에 의과대학 진학을 위한 지방 유학이 늘어날 것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저자들은 비수도권지역 의과대학 출신의 학생들이 배출 지역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졸업 후 수련이 가능해야 하고, 이를 위한 대책이 세워져야 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던 일리노이 의과대학(Southern Illinois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IU SOM)에 의학교육자로 재직하고 있는 한희영 교수의 글은 의과대학이 사회적 책무성을 어떻게 실천하고, 입학정책에도 반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7]. 유럽의학교육협회(Association for Medical Education in Europe)의 사회적 책무성에 대한 상(ASPIRE Award)을 여러 영역에서 수상한 SIU SOM은 남주 일리노이 지역의 의료필요를 채우고자 설립되었으며, 설립의 과정도 주정부 및 지역의료체계와 밀접하게 협력하며 진행되었다. 졸업한 학생들의 34%가 일차의료에 종사하며, 이러한 성과를 학교의 핵심성과지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을 “의과대학 입학시험 성적에 기반하여 기계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자를 보다 총체적으로 심사하여 선발하는” 입학사정과정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거주지와 관련해서 다른 주 또는 외국인에게는 지원자격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필수로 요구하는 등의 기준을 보면 SIU SOM이 주변 지역의 의료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의료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책무를 구체적이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학기준을 우리 의과대학 입시제도에 적용하는 것은 대학입시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으로 논의되고 또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합의에 의해서 그 책무를 위임받는 기구가 증거에 기반해서 지속적으로 의료인력에 대한 체계적인 추계와 전망을 해오지 못한 것은 의료계 또한 반성할 일이다. 의료인력에 대한 추계와 더불어 의료계 내에서 각 의과대학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그 공정성과 투명성을 지지받을 수 있는 의과대학 입시제도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